[ASEAN Trend] 특별기고| 군부 정권 승리했다지만… 신진 정치인 돌풍에 집권층 놀라 태국 정치 패러다임 변하고 있다
입력 : 2019.05.13 11:05:52
수정 : 2019.05.13 11:06:06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지난 3월 24일 치러진 태국 총선 결과의 후폭풍이 거세다. 표면적으로는 현 군부 정당이 예상을 깨고 선거에서 이긴 것으로 나타났지만, 한꺼풀 뒤집어 보면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복잡한 선거 시스템 속에 현 군부 정권을 지지하는 팔랑쁘라차랏당은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이 정당 소속인 프라윳 찬오차 현 총리의 재집권이 유력하지만 상황 전개에 따라 이를 장담하지 못할 수 있는 모습이 곳곳에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집권층의 불안감은 부정 선거 시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정치 공작인 듯한 일련의 상황도 전개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일례로 현 태국 정국에서 실질적 통치기관인 국가평화질서유지위원회(NCPO)가 이번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차세대 정치리더로 자리매김한 아나콧마이당의 타나턴 쯩룽르엉낏 당 대표의 케케묵은 과거 의혹을 들춰내 수사를 하고 있다. 타나턴 대표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 못지 않게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예상치도 못한 젊은 정치인의 부상에 군부가 화들짝 놀라 싹을 자르려 한다는 이야기가 벌써 퍼지고 있다. 이 당은 이번 선거에서 80석 가량을 얻었는데, 태국 정국의 향배를 결정할 수도 있는 의석규모다. 2001년 총선 이래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탁신의 정당도 이번 선거에서 이전만 같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전통의 강자 민주당도 이번 선거에서 참패를 했다. 이처럼 요동치는 태국 정치상황에 대해 매경럭스멘은 태국 정치 전문가인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의 특별 기고를 통해 현 상황을 진단했다.
김홍구 교수는 “예상 밖 군부 정당의 선전, 탁신계 정당의 고전과 민주당의 대패, 타나턴이라는 새 정치인의 등장은 그동안 태국 정치를 주도해왔던 옐로셔츠(왕당파와 기득권) 와 레드셔츠(탁신계)로 대표된 태국 정치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아나콧마이당의 타나턴 쯩룽르엉낏 당 대표
태국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개표 결과 팔랑쁘라차랏당은 약 840만 표를 얻어 790만 표를 얻은 2위 탁신계 프어타이당을 앞섰다. 아나콧마이당이 620만 표를 얻으며 3위를 차지했고, 민주당(390만 표)과 품짜이타이당(370만 표)이 뒤를 이었다. 선관위는 오는 5월 9일이 돼야 공식적인 최종 개표 결과를 발표한다는 입장이지만 선관위 발표를 바탕으로 각종 언론이 집계한 결과를 종합하면 각 당 의석수 윤곽은 거의 드러났다. 4월 1일 태국 영자신문 방콕포스트지가 선관위 발표 지역구 의석수와 득표수를 바탕으로 자체 집계한 비공식 개표 결과에 따르면 프어타이당은 총 137석, 팔랑쁘라차랏당은 총 118석을 각각 얻어 제1, 2당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아나콧마이당은 87석, 민주당은 54석, 품짜이타이당은 52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 중 프어타이당은 지역구 의석이 137석이지만 비례대표는 0석이 예상된다. 팔랑쁘라차랏당이 지역구 97석에 비례대표 21석을 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현 집권층이 유리하게 짜놓은 선거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석수는 유동적이다. 앞으로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고 비례대표의석수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결과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예상을 뒤엎고 전체 득표수에서 팔랑쁘라차랏당이 프어타이당을 앞섰다는 점이다. 정치안정을 원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안정을 원하면 뚜 아저씨(프라윳 짠오차 현 총리의 닉네임)를 찍어라”라는 구호가 먹혔다고 볼 수 있다. 또 새 선거법에 규정된 비례대표 산출방식에 따라 프어타이당은 제1당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150명의 비례대표 가운데 단 한 석도 얻지 못해 하원 의석 점유율이 크게 떨어졌다. 더구나 비례대표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자매정당인 타이락싸찻당이 선거 직전 해산됨으로써 큰 정치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프어타이당의 패배 중 눈여겨 볼 점은 동북부 다음으로 당의 지지세가 강한 북부에서 팔랑쁘라차랏당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의석수를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프어타이당은 29석, 팔랑쁘라차랏당은 25석을 차지했다. 2011년 선거 당시 프어타이당과 최대 라이벌인 민주당은 각각 45석과 12석을 차지한 바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민주당의 대패와 아나콧마이당의 대승을 들 수 있다. ‘옐로셔츠’ 상징인 민주당은 예상보다 훨씬 저조한 55석을 얻는 데 그쳤다. 민주당은 특히 전통적 표밭인 방콕에서 참패했다. 2011년 총선에서 방콕 33개 선거구 중 23석을 확보했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한 곳에서도 지역구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반면 팔랑쁘라차랏당은 총 30석 중 13석을 얻어 방콕에서 가장 많은 지역구 의원수를 확보한 정당이 되었다. 이어 프어타이당과 아나콧마이당은 각각 8석을 얻었다. 또 민주당은 텃밭인 남부지방에서 22석(총 50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11년 총선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의석을 차지했다. 반면 팔랑쁘라차랏당은 남부에서 13석을 확보했다.
이번 총선에서 창당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 정당 아나콧마이당의 예상을 뛰어넘은 대승은 이변에 가깝다. 아나콧마이당은 젊은 유권자의 지지를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5100만 명의 유권자 중 38.1%가 26~45세였으며, 14.3%인 730만 명의 유권자는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18~25세였다. 아나콧마이당의 대승은 기존의 정치판을 뒤엎을 폭발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다. 태국 정계의 차기 주자로 주목받아온 태국 서밋 그룹(Thai Summit Group) 부회장 출신인 타나턴(1978년생) 당대표는 선거기간 동안 군부가 주도했던 헌법의 개정, 국방예산 감축, 개혁적이고 투명한 정부 등을 요구함으로써 총선직후부터 군사정권의 주 공격목표가 되고 있다. 그는 과거 2014년 쿠데타 반대 시위 주모자의 도피를 도와준 폭동 교사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군사법정에 설 가능성도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왕실의 노골적인 정치개입이다. 이전에는 엿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정당추천 총리후보 등록 마감일인 2019년 2월 8일 태국 정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의 첫째 딸이며 마하 와치라롱껀 현 국왕의 누나인 우본랏 랏차깐야 공주가 탁신계 정당인 타이락싸찻당의 총리후보로 등록을 마친 것이다. 태국 왕실의 일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금지돼 있으나 우본랏 공주는 왕족신분을 포기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같은 행보에 나선 것으로 풀이됐지만, 결국 국왕의 반대 속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파장은 컸다. 선관위가 타이락싸찻당이 선거와 관련해 불법적 행위를 했다며 정당해산 결정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왕의 행보도 석연치 않다. 선거 하루 전인 3월 23일 저녁 국왕은 “국가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콘디)’을 선출해 혼란과 어려움을 야기하는 ‘나쁜 사람’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는데,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여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기에 충분했다. 선거 후 국왕은 탁신에게 수여했던 왕실훈장을 박탈해 버리기도 했다. 향후 태국 정치 풍향계와 관련해 관건은 연립정부를 누가 주도해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프어타이당은 의석수에서 원내 제1당이 됐고 팔랑쁘라차랏당은 득표수에서 1위를 했으니 서로 연립정부 구성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두 당은 자신의 당 중심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합종연횡 시도를 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는 프어타이당이 주도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더라도 총리후보 선출에 프어타이당 후보가 총리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는 현행 헌법이 총리 선출에 500명의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250명의 상원의원도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리 선출권을 확보하려면 최소 상하 양원 과반수인 376표를 얻어야 하는데 상원의원은 사실상 군부가 장악하고 있어 프라윳 현 총리가 새 총리 후보로 지명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연정을 구성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여소야대 상황이 발생하면 하원에서 예산안이나 내각불신임결의안을 통해 팔랑쁘라차랏당 총리를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정과 관련해 변수는 5월 9일 공식적인 개표를 앞두고 선관위가 정당별 비례대표 의원배분 기준을 변경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군부 주도의 연정을 꾀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비례대표 의석수 조정을 통해 군소정당의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린 후 이들을 팔랑쁘라차랏당 주도 연정에 동참케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선 재선거도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총선직후에 벌어진 몇 가지 사건들은 군부가 프어타이당과 아나콧마이당 중심의 연립정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정치적 시그널로 보인다. 아피랏 콩쏨퐁 육군사령관은 해외에서 유학한 극단적 좌파 성향의 정치인들은 사회불안을 조성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선거 후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부정선거 의혹이다. 선관위는 당초 투표 당일 밤에 비공식적 개표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가 발표를 수차례 연기하면서 의혹이 커졌다. 탁신 전 총리와 미 국무부, 국제선거 감시단체인 ‘자유선거를 위한 아시안 네트워크(ANFREL)’ 등은 일부 결과 발표가 매우 부정확하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대학생 연합은 선관위원들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얼마 전 태국 선관위는 투표용지 분실 등을 이유로 8개 투표소에 대해 재선거 또는 재검표를 결정한 데 이어,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인 66명 등에 대해서는 고소내용을 모두 조사한 뒤 최종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4월 중 부정선거 혐의를 받고 있는 지역구에 대한 경고카드가 발급되고 재선거를 치르게 될 예정인데 이는 필히 연립정부 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