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악화일로 미국 당파싸움… 미디어와도 전쟁 트럼프 정부인사, 진보 언론에 출연 보이콧
입력 : 2018.08.27 08:22:58
수정 : 2018.08.27 09:07:46
션 해너티, 레이첼 매도우, 앤더슨 쿠퍼
미국 정치 지형은 역사상 가장 극심한 ‘당파적 분열(Partisan Divide)’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도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많지만 워싱턴 정치판은 한 수 위다. 거대 정당들이 상대 정파의 정책에 대해 깡그리 반대하는 행태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엇비슷하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미디어가 이를 대하는 태도다. 한국의 미디어도 뉴스를 선별하고 보도하는 성향에 따라 보수, 진보, 중립 등으로 대략적인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 미디어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전면에 내세운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각자의 주된 시청자 성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공화당 성향의 폭스뉴스와 민주당 성향의 CNN을 번갈아 시청하면 동일한 사안에 대한 시각차가 너무 커 어지러울 지경이다. 매체마다 워낙 정치적 시각이 다르다 보니 미국의 여론 전문가들은 각사 프로그램의 시청률 추이를 분석해 선거 결과를 예측할 정도다. 특히 미디어끼리는 싸움을 지양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상대 미디어에 대한 노골적 비판도 미국 뉴스 채널의 단골 메뉴다. 폭스뉴스 평일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션 헤너티(Sean Hannity)가 대표적 인물이다. 미국 케이블 TV 프로그램 가운데 부동의 시청률 1위를 자랑하는 만큼 주시청자인 보수층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넥타이마저 공화당 색깔인 붉은 색을 주로 매는 헤너티를 종종 백악관으로 불러 식사하면서 공개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헤너티는 불법 이민자 문제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정책을 집중적으로 비판해온 진보적 미디어인 CNN, MSMBC,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을 가리켜 ‘속임수’, ‘상징 조작’이라며 맹비난했다. 최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 후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도 따냈다. 역시 폭스에서 주말 뉴스를 하는 판사 출신의 여성 진행자 재닌 피로(Jeanine Pirro)도 헤너티에 못지않은 입심을 자랑한다. 또 폭스뉴스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미국 전역의 공화당 대회를 순회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매번 단독으로 생중계하고 있다.
진보 진영은 어떨까. 케이블 시청률 2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MSNBC의 레이첼 매도우(Rachel Maddow)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불법 입국자 격리수용 문제를 보도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주장에 트럼프 대통령이 동조했다는 뉴스를 전할 때는 수차례 고개를 가로젓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들은 과거 미국의 전설적 뉴스 진행자인 톰 브로커, 피터 제닝스, 댄 래더 등과는 뉴스를 다루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상대 진영에 대한 노골적 비난도 자제하지 않는다. 이들에 비해 정통파 진행자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CNN의 ‘간판 앵커’ 앤더슨 쿠퍼는 정작 시청률 순위에선 20위권 밖이다.
물론 가장 노골적인 언론 편향성을 지닌 사람은 다름 아닌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 보도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대선 때부터 ‘가짜 뉴스’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미러 정상회담 후 자국 내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즉시 트위터를 통해 “나토(NATO)와 만나 막대한 비용부담을 지우고, 푸틴과는 더 나은 회담을 했다”며 “슬프게도 그런 식의 보도는 없다. 가짜 뉴스들이 미쳐가고 있다(the Fake News is going crazy)”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디어 혐오는 트위터에 대한 집착을 더욱 키우고 있다. 트위터는 자신의 입장을 실시간으로 지지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무기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팔로워 수는 5300만 명을 상회한다. 반면 그가 팔로잉하는 사람은 겨우 47명에 그친다. 가족들과 정부기관 계정 등을 제외하면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중에는 그의 든든한 미디어 파트너인 폭스뉴스의 진행자 션 해너티, 터커 칼슨, 제시 와터스 등이 있다.
▶미러 정상회담 후 폭스뉴스에 단독 인터뷰
폭스뉴스 출신들 승승장구
예상대로 그가 취임 후 가장 많이 출연한 방송도 폭스뉴스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한 뒤 현재까지 폭스뉴스와 폭스비즈니스 등을 합해 총 24번이나 인터뷰를 했다. 트럼프 본인이 2011년에 폭스의 고정 출연자였다는 인연도 있지만 자신의 입장을 가장 충실히 전달해 주는 매체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의 부친이자 전 아칸소 주지사인 마이크 허커비가 진행하는 기독교 방송 TBN의 프로그램에도 가끔 출연한다. 전국 방송이 아니지만 폭스뉴스 등이 이를 받아 대대적으로 보도하니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시청률을 감안할 필요가 없다. 기자회견에서도 진보 매체 기자들에겐 웬만해선 질문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간혹 질문권이 부여되면 입씨름을 벌이기 일쑤다.
북한 문제로 우리에게도 이름이 친숙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경우 CNN의 백악관 출입기자인 존 아코스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손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CNN 인터뷰를 갑자기 취소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 고위직에는 폭스뉴스 출신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이다. 최근엔 장기 공석이던 백악관 공보국장에 폭스뉴스 전 사장인 빌 샤인이 임명됐다. 백악관과 국무부의 홍보 라인을 폭스 출신들이 장악한 셈이다.
진보 진영은 폭스뉴스를 향해 ‘트럼프의 나팔(bullhorn)’, ‘국영 방송’, ‘치어리더’라며 비난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언론관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우려되는 점은 미디어 간 대결과 트럼프 대통령의 미디어 불신 속에 갈수록 미국 국민들의 언론 신뢰도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정치전문매체 악시오스가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화당원들의 무려 92%가 ‘전통 미디어가 고의적으로 가짜뉴스를 보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원들은 불과 53%가 ‘그렇다’고 답했다. 악시오스는 “미디어 신뢰도는 당파 정치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며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나 퓨리서치 센터의 조사도 유사한 결론을 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