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300년 영속·성장기업 찾기 나선 100조원 투자 큰손 손정의 사장
입력 : 2018.08.27 08:21:25
수정 : 2018.08.27 09:07:46
“군(群, 무리) 전략을 통해 300년 이상 영속·성장할 기업을 만들겠다.”
일본 2위 무선통신업체인 소프트뱅크를 주력으로 하는 소프트뱅크그룹 주주총회에서 일본 통신시장 관련 얘기는 뒷전이었다. 3월 결산이라 주주총회는 6월 말에 열렸다.
손 마사요시 회장 겸 사장(이하 사장)은 “앞으로 우리는 유니콘 헌터가 되겠다”며 “소프트뱅크를 통신회사로 보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또 “지금까지 제 시간의 97%를 통신에 썼지만 앞으로는 투자에 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보통 경영자였다면 바로 퇴임 압박에 시달릴 말들이다.
손 사장이 말하는 300년 기업이나 군 전략이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손 사장이 오래된 철학을 다시 꺼내들고 나선 것은 본인의 구상 실현을 위한 준비가 이뤄졌다는 판단에서다. 약 100조원에 달하는 자금으로 세계 최대 스타트업투자펀드인 비전펀드가 출범 1년째를 맞이한 데다 골칫거리였던 미국 무선통신사 스프린트 경영도 흑자로 돌아섰고 T모바일과 합병도 진행 중이다. 본인을 투자가가 아닌 사업가로 규정해왔던 손 사장이 이제는 투자가의 길로 나섰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프트뱅크가 운용을 책임지는 비전펀드는 일반적인 벤처캐피털과 성격은 동일하다. 유망한 기업을 찾아 투자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규모다. 전 세계 모든 벤처캐피털 자금 규모를 다 합해도 비전펀드보다 적다. 엄청난 규모다 보니 투자기업의 체급도 다르다. 투자 대상은 유니콘, 기업가치가 10억달러(약 1조원) 이상으로 평가되는 비상장 벤처기업이다. 자료조사기업인 CB인사이트가 올 초 기준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유니콘 기업은 247개다. 이 중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은 각각 3개(쿠팡·옐로모바일·L&P코스메틱), 2개(프리퍼드네트웍스·메루카리, 메루카리는 6월 상장)다. 영국 반도체 회사 ARM을 비롯해 이미 30여 개 회사에 투자를 진행했다. 한 회사당 1조원가량을 쏟아부으면서 일각에선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과 같은 거품을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 비판과 의문이 쏟아질 때마다 손 사장이 내세우는 답은 군 전략이다.
손 사장은 “머니 게임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며 “비전펀드를 통해 300년 동안 성장하는 기업을 만드는 군 전략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리를 뜻하는 군(群)이란 말처럼 핵심은 최고 기업들을 하나로 묶겠다는 것이다. 그가 ‘무리’를 강조하는 것은 “영속 가능한 기술과 비즈니스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론 때문이다. 장기간 지속가능하고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변화에 맞춰 기술과 비즈니스모델이라는 엔진을 새롭게 갈아 끼워야 한다.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포트폴리오를 짜겠다는 것이 군 전략이다. 소유에 얽매이지 않다 보니 50% 이상 지분을 사들이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다. 소프트뱅크나 비전펀드는 오히려 20~30% 지분 확보를 중시한다. 손 사장은 “모-자회사 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결합을 통해 창업가 집단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한다.
여기까지 들어도 여전히 애매한 게 사실이다. 현재까지 실행에 옮긴 방식을 보자면 전 세계에 확보한 투자기업 간 조율을 통해 과도한 경쟁을 최소화해 손실을 줄이고 흑자전환까지의 시간을 줄이는 식이다. 포트폴리오, 시너지, 에코시스템 등의 화려한 말이 등장하지만 결국 소프트뱅크 제국 안에 들어온 기업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셈이다. 손 사장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재벌 체제와 비슷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경쟁업체 간 급작스러운 화해무드가 시작된 공유차량업계다. 현재 소프트뱅크와 비전펀드는 우버, 디디(중국), 그랩(동남마), 올라(인도)에 투자해 이들 기업의 최대주주다. 투자규모만 70조원에 달한다. 출혈경쟁도 마다않던 우버가 올 1월 손 사장이 최대주주가 된 직후인 4월 동남아 시장에서 철수키로 하는 등 업체 간 조율이 이뤄지고 있다.
초대형 펀드를 고집한 데는 글로벌 IT산업 변화도 한몫했다. 수치를 보자. 2009년 이후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상장기업이 채무상환과 자사주매입에 쏟아부은 돈은 2000조원가량이다. 올해 미국 상장 500대기업이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1300조원을 쓸 계획이다. 이는 설비투자(약 1조달러) 규모보다 더 많다. 이는 IT기업이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는 데 성공한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 세계 주요 IT기업 8사(알파벳,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알리바바, 바이두, 텐센트, 소프트뱅크)의 자산은 1400조원을 넘어섰다. 10년 전에 비해서 15배 늘어났다. 지난 2016년 이후론 세계 최대 투자은행이라는 골드만삭스보다 이들 8개 기업의 자산규모가 더 크다. 손 사장이 100조원 펀드의 투자가 끝나면 1000조원 펀드를 만들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00년 영속·성장기업을 위한 군 전략이 현재까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불안요인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후계자다. 손 사장은 지난해 만 60세가 됐다. 입버릇처럼 60대엔 후계자에 넘겨줄 것이라고 말해 왔던 점을 고려하면 남은 시간은 10년도 되지 않는다. 지난 2015년 후계자로 삼겠다며 구글서 영입한 니케시 아로라는 1년 만에 회사를 떠났다. 지난 6월 소프트뱅크그룹은 3명의 부사장을 임명했다. 비전펀드를 운영하는 도이체방크 출신 라지브 미스라(56), 볼리비아에서 태어나 휴대전화 단말 회사인 브라이트스타를 세운 마르셀로 클라우레(47) 등 내부승진과 함께 일본 우쵸은행 부사장인 사고 가쓰노리(50)를 영입해 부사장에 앉혔다. 우쵸은행은 우리의 우체국은행과 비슷한 곳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서는 “3명의 부사장 간 레이스가 본격화됐다”면서도 “언제 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암중모색기”라며 “후계자 문제는 소프트뱅크의 최대 리스크”라고 평가했다. 과도한 채무 역시 소프트뱅크에 부담이다. 현재 소프트뱅크에서 매년 이자로 지불하는 비용만 4600억엔(약 4조6000억원)에 달한다. 비전펀드만 보더라도 450억달러를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에서 투자하고 있지만 소프트뱅크 역시 250억달러를 부담하고 있다. 소프트뱅크그룹 모회사가 상장된 상황에서 각종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무선통신회사)까지 상장하는 것도 자금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한 측면이 크다. 투자자들이 언제까지 손 사장의 원대한 구상을 받아들여 줄지도 미지수다. 올 소프트뱅크 주총에서 임원보수 상한 안건의 경우 찬성이 66% 선에 그쳤다. 회사 측은 “글로벌 시장에서 우수한 인재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하지만 투자자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