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 격언 중에 ‘일정도 메시지’라는 말이 있다.
정치인의 공개적인 행보에는 모든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선거나 정치적 격돌이 있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정치인 본인의 입으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특정 장소를 찾아가 특정 인물과 만나는 것이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치인의 일정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는 가장 대표적인 나라다. 그리고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분야에서 가장 소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2월 6일 버지니아주 북부에 위치한 리처드 산타나 씨 가정을 방문했다. 산타나 씨 가정은 백악관이 최근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 개설한 ‘#My2K(재정절벽에 떨어지면 중산층 세금이 2000달러 올라간다는 의미)’ 캠페인에 참여한 지지자 26만여명 가운데 선발된 가정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산층으로 지목된 산타나 씨 부부는 아직도 일을 하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 공화당과의 ‘재정절벽(Fiscal Cliff)’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중산층 가정이 떠안게 될 부담을 소상히 설명했다. 통상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 재정절벽으로 지게 될 추가적인 세금부담은 2000달러로 추산된다. 하지만 산타나 씨 가정의 경우에는 산타나 씨와 그의 아버지가 각각 2000달러씩, 총 4000달러의 세금을 2013년에 더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정도 금액이면 어지간한 가정의 두 달치 월세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산타나 씨 가정을 방문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굳이 정치적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런 가정에 불필요한 부담이 생긴다”며 “균형적인 재정적자 감소 계획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상위 2% 고소득층의 세금을 약간 올리는 것”이라며 자신의 평소 주장을 되풀이했다.
얼핏 낡아빠진 ‘정치적 퍼포먼스’로 폄하될 수도 있는 방문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보통 미국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녁시간에 미국의 중하위층 주택가를 다니다 보면 한 집에 차량이 4~5대씩 주차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기가 안 좋고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자식세대가 분가를 꺼리기 때문이다.
2000년 중반 이후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미국에선 여러 대(代)가 함께 사는 ‘대가족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가족과 함께 살면 총 수입은 늘어나지만 공동경비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재정절벽에 떨어지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산타나 씨 가정처럼 돈 버는 가족의 머릿수만큼 ‘세금 폭탄’을 각오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산타나 씨네 방문은 미국 중산층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위기감을 영악하리만치 정확하게 터치했다는 해석이다.
이에 비하면 지역감정에 은근히 호소하면서 시장통이나 역전을 전전했던 한국의 대선주자들은 어떻게 보면 한심하고 애처롭다.
우리의 대선 후보들도 가슴 아픈 사연들의 현장을 찾아가 그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자신의 국정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더라면 그것만으로도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때가 되면 습관적으로 찾아가는 고아원, 양로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주택담보대출 이자 물기에 허리가 휘는 ‘하우스 푸어’ 가정이나, 치솟는 전월세 보증금 메꿀 길이 막막한 ‘렌트 푸어’ 가정, 자식들 사교육비에 속절없이 노후자금을 까먹는 보통 중산층 가정을 찾아가 그들의 얘기를 듣고 위로해주는 장면을 자주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한국사회에 팽배한 정치 불신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았을까. ‘미국 물’ 잘못 먹은 특파원의 ‘공연한 상상’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