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신 친나왓 전 총리 딸인 패통탄 친나왓 신임 총리가 본격적으로 공식 업무에 들어갔다. 취임 후 약 3주 만에 새내각 구성을 완료한 후,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 앞에 취임 선서를 하면서다.
패통탄 총리는 발탁된 후 그의 국정 운영 능력보다는 탁신 전 총리의 막내 딸, 친나왓 가문의 세 번째 총리, 태국 재벌 출신의 역대 최연소 총리, 그리고 재벌가의 패션 등 그의 개인적인 면으로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패통탄 내각이 공식 출범함에 따라 이제 세간은 그의 개인사보다는 국정운영 능력에 더 관심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반대파들이 온갖 트집을 잡는 등 정치적 공격이 거세다.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패통탄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 회복’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침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태국 경제는 옆나라 베트남의 비약적 성장에 비해 초라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의 국정운영 능력이 중요한데, 문제는 그가 큰 틀에서의 경제를 다뤄본 경험이 적다는 것이다. 재벌가의 자제로 기업을 운영하긴 했지만 오롯이 그의 능력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패통탄의 이력을 보면 집권당 대표, 국가소프트파워전략위원회 부위원장 정도를 국정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부친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존재감이 벌써부터 커지고 있다. 패통탄 총리가 난관이 닥칠 때마다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패통탄 자신도 굳이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5년간 나라를 이끌어 봤던 아버지가 든든한 후원군임은 자명하다.
문제는 탁신이 ‘상왕’ 역할을 하며 패통탄을 결국 좌지우지 하지 않겠냐는 우려인데,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패통탄 내각은 9월 초 우선적으로 정부가 추진해 나가야 할 정책과제 10개를 내부적으로 선정했는데, 그 내용이 탁신 전 총리가 지난 8월 22일 현지 매체인 네이션 그룹이 마련한 ‘태국을 위한 비전’의 디너 토크에 나와 밝힌 구상과 거의 비슷하다.
탁신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막대한 국가 채무의 문제, 지하경제의 양성화, 디지털 월렛(전자지갑), 태국의 소프트 파워 강화와 관련한 정책, 인프라스트럭츠 펀드, 기후 변화, 미·중 갈등 속 지정학적 포석 등과 관련한 생각을 밝혔고, 패통탄 새 정부의 주요 정책 구상도 대부분 이 범주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총리 혼자서 주요 정책을 입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탁신 전 총리의 국정 운영 구상을 그가 오롯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패통탄 총리가 속한 당의 중추 세력이 친탁신 세력임을 감안하면 탁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탁신 전 총리가 이 같은 구상을 밝힌 직후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국 국정의 큰 흐름이 이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도 현재 그의 정치적 위상을 가늠케 한다.
논란이 거센 국민 현금 지원 정책이 결국 추진되는 것도 이의 연장선상이다.
집권당의 공약이기도 한 이 정책은 애초 전 국민을 대상으로 1인당 1만바트(약 38만원) 정도의 현금을 디지털 월렛으로 주기로 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포퓰리즘 정책으로 비판을 받으며 반대 목소리가 거세 추진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패통탄 총리도 직에 오른 직후 이 정책의 재검토 의사를 밝히면서 우려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가 디너 토크에서 이 정책과 관련해 취약계층에게 먼저 지원하는 방안을 밝히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 국민이 아닌 취약계층을 타깃으로 먼저 정책을 시행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으며, 결국 새 내각이 묵은 숙제 해결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재검토 의사를 밝혔던 패통탄 신임 총리도 이번에는 “취약계층은 지출 비율이 높기 때문에 확실한 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탁신 전 총리의 발언 후에 이 현금 지급 정책 추진 방향이 바뀌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탁신 전 총리가 정부의 기류를 미리 읽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내에서는 이 같은 모습을 두고, 탁신 전 총리의 영향력이 발휘됐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방콕포스트와 타이PBS 등 현지 매체가 보도한 태국 국립개발행정연구원(NIDA)의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9%가 패통탄 총리가 탁신의 도움이나 지원 없이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더군다나 이런 인식이 비단 태국 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변국에서 조차 새 정부에서 탁신의 존재감을 의식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인도네시아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은 지난 9월 5~7일 사이 태국을 방문해 패통탄과 비공식 만남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 탁신 전 총리가 함께했다.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 당선자는 탁신의 방콕 자택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면서, 인스타그램을 통해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단순히 친분 관계일수도 있지만, 상황을 놓고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탁신 전 총리가 이 같은 우려에 대해 “고문 등의 공식 직책은 맞지 않을 것”이라며 세간의 ‘상왕 논란’을 불식시키려 하지만 돌아가는 모양새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탁신 전 총리가 이처럼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이다.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탁신은 지난해 8월 귀국 이전까지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부패혐의 재판에도 계류돼 있는 터라 귀국이 곧 감옥행일 수밖에 없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지만, 기저에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친군부 보수 진영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가 깔려 있었다.
이런 그가 전격적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은 개혁성향의 전진당이 제1당이 된 지난해 총선 결과 때문이다. 총선에서 승리한 전진당은 그 수순으로 집권당이 되고, 이로 인해 2014년 쿠데타 이후 9년 동안 장기 집권해왔던 군부의 주축이었던 보수 진영은 장기 집권의 막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친군부 보수 진영은 전진당을 탁신보다 더 위협적인 세력으로 간주, 이들의 집권만은 막고자 했다. 그래서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총리 선정과정에서 후보로 출마한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당시 대표에게 대거 반대표를 던졌고, 과반 확보에 실패한 전진당은 결국 집권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패배한 친군부 보수진영은 여전히 단독으로 집권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에 총선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의석을 확보했던 탁신계의 프어타이당과 손을 잡는 선택을 했다. 프어타이당도 ‘집권’이란 ‘대의’ 앞에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한때 앙숙이었던 양측은 한배를 탔고, 탁신세력은 다시 집권을, 군부 진영은 정권 유지에 성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탁신의 거취와 관련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탁신의 15년 만의 귀국은 이 같은 정치적 구도 속에 친군부 보수진영과 친탁신세력 간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탁신의 거취와 관련한 방점은 패통탄 취임 직후 이뤄진 왕실의 사면이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왕실의 탁신에 대한 사면은 귀국 후에도 자숙하며 지내야 했던 탁신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8월 22일 대중 공개 연설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군부와 한 배를 탄 이후 탁신의 정치적 행보도 눈길을 끈다.
친서민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탁신 전 총리지만, 15년 만에 귀국한 그의 행보는 과거와 좀 다르다. 친서민이라기보다는 태국 내 보수주의자들과 맥을 같이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더 이상 태국 내에서 탁신 vs 보수 진영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보수진영에서 탁신을 완전히 신뢰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그의 공간을 허락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한데, 이미 ‘안전판’도 마련해 두고 있다.
탁신은 2015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왕실 비판성 발언과 관련해 왕실모독죄로 기소가 돼 있는데, 언제든 그의 목을 죄어올 올가미다.
왕실모독죄는 태국 내에서 가장 엄격하게 다뤄진다. 태국 내 보수진영이 전진당을 바라보는 시선 중 가장 우려스러웠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전진당은 지난 총선에서 왕실모독죄 개정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호응이 꽤 컸다. 하지만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당까지 해산된 상태다.
탁신이 왕실모독죄에 연루됐다는 것은, 그도 언제든 상황 변화에 따라 또 다시 정치적 망명길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다만 탁신은 향후 1년 동안은 왕실모독죄와 관련된 급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 재판이 내년으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태국 전문가인 김홍구 전 부산외대 총장은 이를 두고 “한 마디로 태국내 보수진영이 탁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관련 재판의 첫 심리일이었던 지난 8월 19일 탁신 전 총리는 노란색 셔츠를 입고 방콕 형사법원에 등장했다. 노란색 셔츠는 태국 보수 진영의 상징이다.
여기서 드는 한 가지 드는 의문점이 있다. 패통탄 총리가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군부진영의 공세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방콕포스트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선거관리위원회, 국가반부패위원회(NACC) 등에 패통탄 총리와 그가 대표인 집권당 프어타이당을 겨냥한 조사 요청이 여러 건 제출됐다. 이는 군부가 정적을 제거할 때 쓰는 전통적 수법이다.
그런데 탁신이 사면을 받고 공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친군부 보수진영이 그를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된 흐름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인데, 사실 패통탄에 시비를 거는 군부 진영은 이번 연정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패통탄 총리 진영은 이번 연정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세타타위신 전 총리 시절 함께 한 팔랑쁘라차랏당(PPRP)을 배제했다. 그 대신 민주당을 참여시켰다.
PPRP는 2014년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쁘라윗 웡수완이 만든 당이다.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패통탄을 예의 ‘고발’이라는 방법으로 압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 태국 전문가는 “PPRP가 군부진영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최근 태국 내 친군부 및 친왕실 보수주의자들의 흐름과는 다소 맞지 않는 행보를 하고 있다”면서 “현재 태국 내부에서 권력 다툼 양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고 했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9호 (2024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