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된 미국의 경제 지표가 인플레이션이 둔화되고 있다는 신호를 강하게 보내고 있다.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 역시 점점 커지고 있다. 5월 나온 생산자물가지수(PPI)와 소비자물가지수(CPI)의 발표는 시장 예상을 크게 밑돌았다. 미국 노동부는 6월 13일(현지시간) 5월 PPI가 전월 대비 0.2%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전문가 예상치였던 0.1% 상승을 크게 밑도는 결과였다. 4월 0.5% 상승에서 수치는 급격하게 꺾였다. 전년 동월 대비로는 2.2% 상승해 예상치인 2.5%를 밑돌았다.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 무역 서비스를 제외한 근원 PPI도 0.3% 상승 예상과 달리 변동폭 0%에 그쳤다.
상품 가격이 0.8% 내려가면서 PPI 하락을 이끌었다.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을 보였다. 에너지는 4.8%, 식품은 0.1% 각각 하락했다. PPI는 CPI를 몇개월 선행하는 핵심 인플레이션 지표로 사용된다.
이보다 하루 먼저 나온 5월 CPI 역시 전월 대비 보합에 머물렀다. 전년 동월 대비 3.3% 상승해 4월 3.4%보다 둔화됐다. 근원 CPI도 전월 대비 0.2%, 전년 동월 대비 3.4% 상승해 각각 전망치를 0.1%포인트씩 밑돌았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은 근원 CPI에 주거비까지 뺀 슈퍼코어 CPI가 3년여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CPI에서 본 주거비는 쉽게 떨어지지 않아 그동안 골칫덩이로 여겨졌다.
일각에서는 CPI로 본 주거비는 후행하는 지표로, 현실의 렌트비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민간업체인 질로우에서 본 주거비는 이미 상당히 떨어진 상황인데 통계 처리상의 문제 때문에 CPI 주거비가 실제 상황 대비 훨씬 높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CNBC는 이러한 차이를 지적하며 “주거비가 실제보다 높게 반영되는 문제가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블랙스톤은 미국에서 가장 큰 아파트 임대 사업 운영자인데 우리 데이터에 따르면 임대료는 많이 하락했다”며 “임대료를 제외한 실제 CPI는 이미 0%에서 2% 사이에 있다”고 설명했다.
CPI 발표 날 함께 열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는 기준금리가 7회 연속 동결됐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인플레이션 목표치 2%를 향한 완만한 추가 진전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금리 인하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FOMC의 핵심은 금리 움직임이 아니었다. 함께 나오는 점도표에 관심이 집중됐다. 지난 3월 나온 점도표에서 연준은 올해 금리 인하 3번을 시사한 바 있다. 3번이 2번이 되느냐, 혹은 1번으로 줄어드느냐에 이목이 집중됐다. 결론은 1번 인하였다. 연준이 보수적인 선택을 택한 것이다.
파월 의장은 “점도표는 연준 위원들의 개인적인 전망일 뿐이며, 실제 금리 정책은 향후 경제 지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라며 “우리는 경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말 금리 전망치 중간값은 5.1%로 3월 전망(4.6%)에서 0.5%포인트 올라갔다. 연준 위원들이 생각하는 인하 시점에 대한 관점이 엇갈렸다. 8명은 2차례 인하, 7명은 1차례 인하에 점을 찍었다. 무려 4명은 ‘올해 인하 없다’에 한 표를 던졌다. CNBC는 “연준 위원들 사이에서 금리 인하 시기에 대한 의견 차이가 크다”고 전했다.
시장 일각에서 공격적인 금리 인하 베팅이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연준이 금리 인하에 대해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파월 의장이 더 많은 금리 인하를 위한 문을 열어두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5월 CPI가 예상보다 낮게 나온 점을 들어 최소 2회 이상의 금리 인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베시 스티븐슨 미시간대 경제학 교수는 “현재 PPI와 CPI 모두 인플레이션율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좋은 신호”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물가 상승을 자극하는 주된 배경이 됐던 노동시장 과열에 대해선 충분하지는 않지만 진정돼 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파월 의장은 “광범위한 경제 지표들은 현재 미국의 노동시장 여건이 팬데믹 직전 우리가 위치했던 지점으로 복귀했음을 보여준다”며 “상대적으로 단단(tight)하지만 과열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실제 미 노동부가 내놓은 6월 2∼8일분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도 고용의 완화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노동부는 이 기간 청구 건수가 24만2000건으로 한 주 전보다 1만3000건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8월 6∼12일 주간(24만8000건) 이후 10개월 만에 가장 높다. 다우존스의 전문가 전망치(22만5000건)도 웃돌았다. 실업수당 청구 건수의 증가는 미국의 노동시장 과열이 해소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 연준은 노동시장 과열이 인플레이션 고착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FOMC 회의에서 금리 인상을 고려한 위원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금리 인상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진 않겠지만, 금리 인상을 기본 전망으로 고려한 위원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캐피털 이코노믹스(Capital Economics)는 “전반적으로 정책 결정문이나 기자회견에서 9월 인하를 배제하는 내용은 없었다”면서 “예상대로 고용이 둔화되고 디스인플레이션 추세가 재개된다면 여전히 올해 2차례 금리 인하가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라고 평가했다.
씨티(Citi)는 “기자회견은 비둘기파적에 가까웠다”면서 “완만한 인플레이션만으로도 9월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며, 노동시장의 약화가 이어지면서 이후 7번의 회의에서 연속으로 인하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봤다. 반면 캐나다왕립은행(RBC)은 “5월 CPI가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단 1번의 데이터로 인플레이션이 추세적으로 하향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제프리스(Jefferies)는 “현재로서는 데이터를 예측하기 매우 어렵고, 연준은 향후 금리 전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역 연방은행 총재들도 신중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물가가 완전하게 내려왔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 섣불리 금리를 내리다가는 추후 인플레 재발에 따른 리스크가 우려된다는 평가다.
로레타 메스터 클리블랜드 연은 총재는 6월 14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를 ‘위대한 소식’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금리 인하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몇 달 더 좋은 지표를 봐야 한다”며 “인플레이션이 내려가고 추가로 단기 인플레이션 기대치까지 하락하는 더 좋은 지표가 몇 달 더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 연은 총재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내놨다. 그는 “이번에 나온 물가 지표에 안도했다”고 말하면서도 “몇 달간 비슷한 수치를 봐야 금리 인하를 결정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