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최대 정치 이벤트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8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3월 11일 폐막했다. 내수와 소비 둔화 등으로 연초부터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공포가 확산되면서 이번 양회에선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시장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의 부양책은 없었다. 오히려 공고해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1인 체제와 대미(對美) 견제만 재확인했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3월 5일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개회식 업무보고에서 “중국 내외 상황과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했다”며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로 지난해와 동일하게 ‘5% 안팎’을 제시했다. 5% 안팎이라는 목표는 1991년(4.5%)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수치로 사실상 중국 경제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정책도 발표했다. 리 총리는 “국가 부흥 과정에서 일부 주요 프로젝트의 재정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올해부터 몇 년간 초장기 특별국채를 발행할 계획”이라며 “국가 주요 전략의 이행과 중점 분야의 안보 역량 구축을 위해 올해 첫 발행 규모는 1조위안(약 185조원)”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1조위안 규모의 초장기 특별국채를 발행하는 것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26년 동안 네 번에 불과할 정도로 드문 일이다. 지방정부를 위한 신규 특별채권 발행 규모도 1년 전보다 1000억위안(약 19조원) 많은 3조9000억위안(약 722조원)으로 정했다.
올해 재정적자 비율도 지난해와 동일하게 3%로 결정했다. 이에 따른 적자 규모는 지난해 예산보다 1800억위안(약 33조원) 늘어난 4조6000억위안(약 851조원)이다. 지난해 전인대에서도 재정적자 비율을 3%로 제시했지만 경기 악화 탓에 그해 하반기 3.8%로 상향한 바 있다.
부동산 시장 부양과 내수 진작 의지도 드러냈다. 리 총리는 “부동산 정책을 최적화하고 소유 시스템이 다른 부동산 기업의 합리적인 자금 조달 요구를 차별 없이 지원하겠다”며 “내수 확대 전략을 실행하고 소비와 투자를 조정해 경제 성장 견인 효과를 높일 것”이라고 전했다. 또 소비 촉진을 위한 ‘이구환신(以舊換新·옛것을 새것으로 교체)’ 정책도 꺼냈다. 환경 규제나 정책을 통해 오래된 자동차와 가전 등을 교체하는 식으로 수요를 자극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해외 금융 전문가들은 지난해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에도 경제 성장 부진이 계속된 만큼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 목표가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동안 많은 해외 금융기관과 투자은행(IB)은 올해 중국 경제성장률로 4%대 중반을 점쳐왔다. 특히 기대하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보이지 않다 보니 5% 안팎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 마저 제기된다.
UBS의 왕타오 아시아담당 수석연구원은 이에 대해 “추가적인 부양책 없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숫자”라고 진단했다. 이어 “중국의 부동산 시장이 아직도 안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하방 압력이 더 크다”며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로 기존 전망치인 4.6%를 유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양회에선 시 주석의 권력이 한층 강화됐다는 점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실제 올해 처음 전인대에서 업무보고를 한 리 총리는 ‘시진핑’을 16회, ‘당 중앙’을 13회 언급했다. 지난해 리커창 전 총리의 업무보고 때보다 두 단어의 언급 횟수가 각각 2회, 4회 증가한 것이다. 리 총리는 업무보고 현장에서 시 주석을 향해 수차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기도 했다. 특히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권위 있고 집중된 통일 영도를 견지하겠다”며 “(당의 결정을) 잘 관철하는 집행자·행동파·충실한 행동가가 되겠다”는 리 총리의 발언은 이목을 끌었다. 중국 정치 제도의 근간인 ‘당정 분리’가 사실상 무색해졌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은 경제 분야를 책임지는 총리가 최고지도자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구분했다.
또 지난 33년간 유지하던 총리 기자회견도 올해부터 폐지됐다. 러우친젠 전인대 대변인은 3월 4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사전 브리핑에서 “올해 양회에서는 (리창) 총리의 기자회견을 개최하지 않는다”며 “특별한 상황이 없다면 이번 전인대 후 몇 년 동안 총리 기자회견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991년 리펑 총리가 처음 실시한 이후 1993년 주룽지 총리 시절 정례화된 전인대 폐막 총리 기자회견은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 볼 수 없게 됐다.
양회 마지막 날에는 총리 권한을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국무원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국무원조직법 개정은 이 법이 제정된 1982년 이후 42년 만에 처음이다. 이로써 독립적으로 통화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은 당의 통제를 받게 됐다. 그만큼 시 주석의 1인 체제가 더 공고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공교롭게도 전인대 폐막을 하루 앞두고는 시 주석의 권한 독점에 불만을 품은 초유의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3월 10일 새벽 시 주석의 관저와 집무실이 있는 베이징 중난하이 남문을 향해 검은색 차량이 돌진한 것이다. 차량은 바리케이드에 걸리며 중난하이 경내로 진입하진 못했다.
차량을 몰고 온 남성 운전자는 ‘중국 공산당은 살인범’이라 외쳤고 그 자리에서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뒤 연행됐다. 구체적인 사건 경위와 운전자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일각에서는 시 주석의 권력 독점에 반감을 품은 세력이 실력 행사로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불안한 미중 관계도 다시 한번 확인됐다.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장관)은 양회 계기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을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1년 전 원색적으로 미국을 비난한 친강 전 외교부장에 비하면 비교적 유화적인 어조로 말했지만, 미국의 대중(對中) 인식을 꼬집으며 조목조목 지적했다.
왕 주임은 3월 7일 베이징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외교 주제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잘못된 대중 인식이 여전하다”며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중국을 억압하는 수단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일방적인 제재 리스트도 늘어나고 있다”며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의지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국이 항상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강대국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이 자신의 번영만 유지하고 다른 국가의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국제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이 공급망 최상단을 독점하고 중국을 최하단에 머물도록 한다면 공정한 경쟁은 어디서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직면한 도전은 중국이 아니고 자신에 있다”며 “미국이 중국 탄압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스스로를 해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지난해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이후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의 대중 수출 통제 수위를 더 조이고 있다. 기술 견제뿐 아니라 대만 문제를 두고서도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