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간 아베노믹스의 중심축인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이어온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후임으로 경제학자이자 금융 정책에 정통한 우에다 가즈오 전 일본은행 심의위원이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우에다 전 위원은 일본은행에 의한 제로금리 도입을 이론적으로 지원했고, 장기 완화 정책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에다 전 위원이 태평양 전쟁 후 처음으로 학자 출신 총재에 오르게 되면 물가 상승, 채권 시장 기능 저하 등의 부작용을 보이고 있는 금융 완화 정책을 검증하고 수정 여부를 결정하는 게 주요 과제로 꼽힌다. 우에다 전 위원이 당분간 금융 완화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지만 완만하게 출구를 모색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일본은행 총재와 부총재는 중의원과 참의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되며 임기는 모두 5년이다. 중의원과 참의원은 우에다 전 위원을 불러 금융 정책 등에 대한 견해를 듣고 질의하는 청문회 절차를 가진 후 동의 여부를 결정한다. 일본 정부는 3월 중순까지 의회의 동의를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에다 전 위원은 도쿄대 졸업 후 미국 MIT의 박사과정을 거쳐 도쿄대 경제학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특히 1998년부터 7년여간 일본은행의 심의위원으로 활동해 이론·실무를 겸비했다는 평가가 있다. 우에다 전 위원이 총재에 오르면, 태평양 전쟁 후 첫 학자 출신으로 기록된다.
일본이 1990년대 후반부터 디플레이션에 빠진 상황에서, 우에다 전 위원은 1999년의 제로금리 정책과 2001년 양적 완화 정책의 도입에 대해 이론적으로 지원했다. 그 후 20년을 넘게 장기 완화 정책에 정통한 학자로 꼽혀왔고 국제적 학자인 만큼 해외 중앙은행이나 시장과도 원활히 소통을 하며 리스크 관리 등을 해나갈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우에다 전 위원은 작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우에다 전 위원에 대해 “국제적으로 저명한 경제학자로 (일본은행 총재로) 최적임자라고 판단했다”며 “이론과 실무 양면에서 금융 분야에 식견이 높다”고 평가했다.
우에다 전 위원이 일본은행을 이끌게 될 경우 채권 시장의 기능 저하와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을 보이고 있는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검증하고 어느 정도 수정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2013년 3월 취임한 구로다 총재는 디플레이션의 탈출을 위해 그해 4월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시작했고 이는 아베노믹스의 주요 축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어 2016년 1월에는 마이너스금리 정책 도입을 결정해 금융기관이 일본은행이 맡기는 당좌예금의 일부에 대해 마이너스금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장단기 금리 조작 정책을 도입했다.
경기 활성화를 위한 일본의 대규모 금융 완화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가 금리 인상에 나선 지난해에도 계속됐다.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8차례 기준금리를 올렸다. 하지만 구로다 총재가 이끄는 일본은행은 경기 활성화를 위해 단기금리를 0.1%로 유지하고 장기금리(10년물 국채금리)는 0% 정도로 유도하되 변동허용폭을 ±0.25% 정도로 하는 금융 완화 정책을 지속하다가 작년 12월 들어서야 변동허용폭을 확대하는 ‘부분 수정’을 가했다.
미국 등의 금리 인상에도 일본은행이 대규모 금융 완화를 고집하면서 미일 금리 차가 확대됐고 이게 엔화가치 약세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제 원자잿값이 상승한 데다 엔저(엔화가치 약세)가 더해지자 디플레이션의 대명사 일본에서도 물가상승률이 높아지면서 서민 부담을 키웠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신선식품 제외, 전년 동기 대비)은 작년 1월 0.6%였으나 4월부터 2%대로 올라섰고 지난 9월에는 3%를 기록했다. 작년 1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1년여 만의 최고치인 4%였다. 작년 일본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3%로 2014년(2.6%) 이후 8년 만에 최대 오름폭을 보였다. 2014년에는 소비세 상승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면 1991년(2.9%)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10년물 국채를 기준으로 하는 장기금리의 상승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시장 왜곡이 발생하고 채권 시장의 기능이 저하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본의 재무성이 ‘시장 기능 저해가 커지고 있다’는 뜻을 일본은행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은 작년 12월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에 일부 수정을 가했다. 작년 12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단기금리는 -0.1%로 동결했지만 장기금리의 기준이 되는 10년물 국채 금리는 0%로 유지하되 변동허용폭을 기존 ‘±0.25% 정도’에서 ‘±0.5% 정도’로 확대했다.
일본은행이 장기금리를 억제하는 방식은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이다. 일본은행이 0.5%에 국채를 사들이면, 은행·민간 부문에서는 0.5%보다 높은 금리(싼 가격)로 다른 투자자에게 판매할 이점이 없어지기 때문에 금리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를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이라 부른다. 따라서 변동허용폭이 0.25%에서 0.5%로 0.25%포인트 높아진 것은 사실상 그만큼 금리를 올린 효과를 낼 수 있고 이에 대해 일본은행이 대규모 금융 완화를 일부 수정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지속해온 대규모 금융 완화로 채권 시장 기능 저하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 만큼, 그동안의 효과 등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고 이 검증 결과에 따라서는 정책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따라서 우에다 위원이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할 경우 금융 완화 정책의 검증과 수정 여부 결정 등이 주요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금융 완화 정책의 수정 가능성 등도 제기하고 있다. 닛케이는 “금융 시장에서는 우에다 씨가 총재로 취임할 경우 완만하게 금융 완화의 출구를 모색할 것이라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금리의 상승은 기업 투자와 경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금융 완화 정책의 수정을 통해 연착륙 방안을 찾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김규식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50호 (2023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