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3기를 맞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분배 정책에 무게를 둔 ‘공동부유(共同富裕)’를 핵심 경제의제로 내세웠다. 공산당의 헌법인 당장에 ‘전체 인민 공동부유의 점진적 실현’이라는 문구도 명기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제창한 선부론(先富論·일부가 먼저 부유해진 뒤 이를 확산한다)을 사실상 폐기하고 사회주의를 향한 ‘좌향좌’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중국 공산당은 공동부유를 위한 3단계 액션플랜도 공개했다. 1차는 계층·지역 간 소득 격차 축소를 위한 분배, 2차는 정부가 세금과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진행하는 분배, 3차는 자발적인 민간 기부, 자선사업 등을 통해 약자를 구제하는 분배다.
시 주석은 지난 10월 열린 제20차 공산당 당대회 개막식에서 “재산 축적의 메커니즘을 바로잡겠다”며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최고 지도부가 부의 축적 방식을 관리하겠다고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는 부유층에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당장 중국 안팎에서는 부동산 보유세, 상속세, 부유세 등이 신설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중국 부호들은 시 주석의 ‘공동부유’ 구호에 휘청이는 모습이다. 공동부유 깃발 아래 이뤄진 각종 규제와 소비 심리 악화로 인해 자산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최근 발표한 ‘2022 중국 본토 부호 명단’에 따르면 이들의 전체 자산은 9071억달러(약 1216조원)로 작년 조사 당시 1조4800억달러보다 39% 감소했다. 이런 감소율은 포브스가 이 순위를 발표하기 시작한 2001년 이후 최대다. 100명 중 79명의 자산이 줄었다.
생수업체 농푸산취안 창업자인 중산산이 작년에 이어 1위를 유지했지만, 총재산은 작년 659억달러에서 올해 623억달러(약 85조원)로 하락했다. 동영상 공유 플랫폼인 틱톡을 보유한 바이트댄스의 창업자 장이밍은 작년 대비 99억달러(17%) 줄어든 495억달러로 2위를 차지했다. 또 3위인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제조업체인 CATL(닝더스다이)의 쩡위췬 회장의 재산은 지난해 508억달러에서 43% 줄어든 289억달러로 집계됐다.
중국 빅테크들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마화텅 텐센트 회장은 52% 감소한 234억달러, 마윈 알리바바 전 회장은 50% 줄어든 206억달러로 집계돼 재산이 반토막 수준으로 추락했다. 37위인 가전업체 샤오미 창업자 레이쥔의 재산은 179억달러에서 76억달러로 수직 하락했고, 32위인 전자상거래업체 징둥 창업자 류창둥도 작년 176억달러에서 올해 83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중국 부호들은 자산이 줄었지만 오히려 기부금은 크게 늘렸다. 시 주석이 공동부유를 강조하면서 중국 부유층과 기업들은 충성 경쟁을 하듯 앞다퉈 ‘자발적 기부’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SCMP가 중국 후룬연구원이 발표한 ‘2022 후룬 중국 자선활동 명단’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올해 8월까지 1억위안(약 188억원) 이상 기부자는 모두 49명이며 이들의 기부총액은 100억달러(약 13조3000억원)에 달했다. 이는 후룬연구원이 지금까지 19차례 진행한 조사 가운데 사상 최대 규모다.
가장 기부를 많이 한 상위 3인이 중국 공산당의 핵심 타깃인 빅테크 창업자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기부 1위는 중국 2위 전자상거래업체 징둥닷컴의 창업자 류창둥으로 지난 2월 자신의 지분을 자선 재단에 기부했다. 당시 징둥은 미국 증시 공시를 통해 류창둥이 자신이 보유한 보통주 6238만 주를 제3의 공익재단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부액 규모는 20억5000만달러(약 2조7300억원)였다.
기부 2위는 중국 최대 음식 배달서비스 플랫폼 메이퇀의 창업자 왕싱으로 20억3000만달러(약 2조7000억원)를 기부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회사 지분의 약 10분의 1인 5700만 주를 교육과 과학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자신의 자선 재단에 기부했다. 왕싱의 뒤를 이어 기부 3위를 차지한 인물은 스마트폰 제조사 샤오미의 공동 창업자 레이쥔이었다. 레이쥔 창업자는 총 20억달러(약 2조6700억원)를 기부했다. 자신이 보유한 회사 주식 3억800만 주를 샤오미 재단과 자신의 재단에 기부했다. 그의 총자산은 89억달러 규모다.
이른바 ‘시진핑 리스크’를 피해 중국을 떠나려는 억만장자도 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국유기업 부양에 치중하고 시장보다는 분배에 더 방점을 둔 ‘공동부유’ 정책을 피해 외국으로 떠나는 중국 부호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의 드류 톰슨 선임연구원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민간 기업들의 하향세 기울기가 관건”이라면서 “가파를수록 기업가들이 해외로 이주해 부(富)를 지키려는 노력을 가속할 것”이라고 짚었다.
중국 부호들의 도피처는 과거 대부분 홍콩이었지만 최근에는 싱가포르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홍콩의 중국화로 인해 중국 억만장자들이 더 이상 홍콩을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지 않는 데다 싱가포르 세율이 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근래 싱가포르에 ‘패밀리오피스’가 늘어난 데서도 중국 억만장자들의 싱가포르 러시를 확인할 수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작년 말 기준으로 싱가포르 내 패밀리오피스는 700개로 전년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고 짚었다.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도 구체적인 국가 명칭을 밝히지 않은 채 2021년에 16%의 외부 자금 유입이 있었다고 확인했다. 중국 자금의 싱가포르행은 부동산 시장에서도 포착된다. 세계적인 부동산 불황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부동산 평균 거래가격은 올해 1~9월 전년 동기 대비 8% 올랐다. 싱가포르의 고급 콘도미니엄을 구매하는 중국인들도 급증했다.
중국 부호들의 ‘중국 엑소더스’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핸리 앤드 파트너스의 추산 자료에 따르면 올해 중국에서 자금 반출을 희망하는 고액 자산가는 1만여 명, 자산 규모는 480억달러에 이른다.
[손일선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