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한중 수교 첫해인 1992년 중국 후이저우에 공장을 세웠다. 라디오 등을 생산하던 이 공장은 2006년부터 삼성 스마트폰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때 후이저우 공장 생산량은 삼성전자가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스마트폰 물량의 17%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폰이 중국 시장에서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지난 2019년 후이저우 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아모레퍼시픽은 올해 중국 내 이니스프리 매장 140곳을 폐점했다. 한때 600개가 넘는 이니스프리 매장에 중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매장을 찾는 고객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중국 매체들은 올해 들어 “한국 화장품이 중국에서 빛을 잃었다”라고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한때 삼성 스마트폰과 한국 화장품은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 제품이었다. 2013년까지 삼성전자 스마트폰은 중국 시장에서 20%대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다. 한 베이징 교민은 “10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삼성 스마트폰은 부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 했다.
한국 화장품 역시 한류에 관심이 높은 젊은 중국 여성층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었다. 국내 주요 면세점의 아모레퍼시픽 매장이나 LG 화장품 매장에 중국 관광객들이 긴 줄을 서있는 풍경은 한때 일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중국 시장 1위의 위상을 뽐냈던 삼성 스마트폰은 현재 점유율이 0%대로 추락하면서 중국 시장에서 존재감을 거의 상실했다. 한국 화장품의 중국 내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올해 중국 상반기 최대 쇼핑축제인 6·18 행사에서 한국 브랜드들은 화장품 판매 톱10에 하나도 포함되지 못할 만큼 인기가 크게 추락했다.
SK그룹이 중국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 SK타워를 중국 허셰건강보험에 매각했다.
지난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올해로 30주년이 됐다. 이 기간 동안 양국의 경제적 교류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중국의 개방개혁 기조에 발맞춰 한국 기업들은 앞다퉈 ‘기회의 땅’ 중국으로 진출했고 한국의 대(對)중국 교역액은 30년간 47배 증가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중국은 한국에게 기회보다는 리스크 요인으로 더 부각되고 있다. 정부나 시장에서 “중국 파티는 끝났다”라는 취지의 발언이 계속 나오는 이유다.
이를 가장 절감하는 곳은 역시 기업들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제2의 도약을 위해 중국으로 진출했던 국내 기업들이 요즘에는 중국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하거나 아예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급등한 인건비와 예측불허의 공산당 규제를 감당하지 못하던 국내 기업들이 사드 사태와 코로나19 사태, 미중 갈등을 계기로 ‘차이나 리스크’ 줄이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상품성이 크게 떨어진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 수입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지난해 기준 8.0%로 2017년 대비 1.9%포인트 하락했다. 이는 중국의 10대 수입국 중 가장 큰 하락 폭으로, 중국과 무역분쟁을 겪은 미국의 수입 시장 점유율 하락 폭(1.7%포인트)보다도 컸다.
국내 5대 그룹 행보를 보면 이같은 어려움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난 2019년 중국 내 스마트폰 공장을 모두 베트남 등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 삼성은 이후에도 톈진의 TV 공장과 쑤저우 PC 공장 문을 닫았고 LCD 사업에서도 철수했다. SK그룹 중국 지주사인 SK차이나는 지난해 6월 베이징SK타워를 매각한 데 이어 두 달 뒤에는 중국 SK렌터카 지분 100%를 도요타에 매각하며 중국 사업 구조조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LG 역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가전 분야에서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가전 업체들에 밀려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점차 중국 사업을 줄여나가고 있다. LG는 LG 중국 사업을 상징하던 ‘LG 베이징 트윈타워’도 매각했다.
현대차그룹도 중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저가 브랜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전기차 시장으로 중국 시장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2016년 7.35%까지 올라섰던 현대·기아차의 중국 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1.7%로 추락했다. 이로 인해 지난해 현대차의 중국 첫 생산기지인 베이징 1공장을 매각했고 다른 중국 내 공장도 매각하는 방안을 저울질하고 있다.
사드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국 보복의 핵심 타깃이 됐던 롯데는 2017년부터 순차적으로 백화점, 마트, 홈쇼핑 등 유통사업과 제과, 음료 등의 식음료 사업을 정리해왔다. 최근에는 중국 내 롯데의 마지막 매장인 청두롯데백화점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사드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국 보복의 핵심 타깃이 됐던 당시 중국 장쑤성 렌윈강의 롯데마트 지점이 영업정지 처분으로 문을 닫은 모습.
일반 기업들의 중국 신규 진출도 크게 줄었다. 수출입은행 통계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중국 신규 법인 숫자는 2005년 2392개였지만 지난해에는 262개로 급감했다. 국내 기업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들이 중국 진출을 꺼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강력한 제로코로나 정책과 경기 위축으로 사업환경이 악화된 데다 주요 납품처였던 국내 대기업들이 잇달아 중국에서 철수하면서 중소기업들도 중국행을 중단한 것이다.
중국 내에서 한국 기업들이 작아지는 것도 문제지만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급격히 커지면서 해외 시장에서 한중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점도 한국 기업들에게 위협적인 요인이다. 핵심 유망산업 중 하나인 전기차와 배터리 분야는 양국의 핵심 전쟁터 중 하나다. 중국이 치고 나가면 바로 한국이 뒤쫓는 양상이지만 점차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강 자리에 오른 지 17년 만인 지난 2021년 중국에게 왕좌를 빼앗겼고 세계 선박 시장에서도 한국과 중국은 세계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이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 기술동맹을 더욱 강화해 중국과의 격차를 더 확실하게 벌려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고 있다. 반도체처럼 한국이 중국을 압도할 수 있는 분야에서 초격차를 유지하고 비교우위 분야를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