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방위력을 5년 내 근본적으로 강화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방위비를 상당히 증액할 결의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6월 1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9차 아시아 안전보장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일본 총리로는 8년 만에 기조연설에 나서 역설한 내용이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독일은 안보정책을 전환하며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높이기로 했다’고 예를 들며 자신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이 중국의 팽창주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등을 배경으로 방위력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적 기지를 공격(반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헌법 개정을 통해 자위대 명기를 추진하는 등 기존의 안보·방위 전략에서 전환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의 이런 움직임에는 기시다 총리뿐 아니라 집권 자민당이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방위비 증액을 비롯한 방위력 강화에 대해서는 미국도 지지 의사를 표명한 만큼 7월 참의원 선거 등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추진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시다 총리의 의지와 미국의 지지가 구체화된 장면 중 하나는 지난 5월 23일 도쿄에서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 회담이 끝난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일본의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바탕이 되는 상당한 방위비의 증액 결의를 표명했고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강한 지지를 얻었다”며 “적 기지 반격(공격) 능력을 포함해 모든 선택지를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일본이 방위력을 강화하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며 “강한 일본과 강한 미일 동맹은 지역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6월 10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19차 아시아 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자민당의 방위력 강화 의지는 최근 기시다 총리에게 제출한 ‘새로운 국가안전보장 전략’이라는 제안서에서 보인다. 제안서의 주요 내용은 ▲중국의 군비 확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미사일 능력 향상 등을 배경으로 안보 정책을 확충하고 방위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제안서에서 관심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방위비를 5년 내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증액하자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가 샹그릴라 대화에서 언급한 ‘독일의 방위비 GDP 2%까지 상향’과 궤를 같이한다.
이 원칙은 1987년 폐지돼 1987~1989년 일본 방위 예산이 GNP의 1%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도 이후로 방위비 예산이 GNP 또는 GDP 대비 1%를 웃돈 것은 리먼 쇼크 영향으로 일본 GDP가 감소했던 2010년도 정도뿐이다. 2022년도(올해 4월~내년 3월) 일본 방위비는 본예산 기준으로 5조4005억엔으로 GDP의 0.96% 수준이다.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은 지난 5월 24일 “엄중한 안보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방위체제를 정비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기시다 총리의 (방위비 증액) 결의에 대해 찬성을 표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시다 내각은 6월 7일 각의(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경제 재정운영과 개혁의 기본방침 2022’에서 방위 예산을 대폭 확대한다는 방침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방위비 증액에 나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재원 마련과 재정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5년 만에 방위비를 GDP 대비 2% 수준으로 하려면 현재의 거의 두 배로 확대되는 셈이고 매년 1조엔 넘게 늘려야 한다면서 방위비를 어느 정도 올리고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향후 초점이라고 평가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은 지난 6월 12일 방위비 규모와 관련해 “필요한 것을 쌓아 올리면 어쨌든 10조엔 규모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10조엔은 2022 회계연도 방위비(5조4005억엔)의 두 배 수준이다. 다카이치 정조회장은 의문이 제기되는 방위비 증액의 재원 조달과 관련해 “일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비를 깎아서는 안 되고 단기적으로는 국채를 발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줄여서 방위비를 늘리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일본 경제를 확실하게 확대해, 파이 전체를 크게 해서 국방비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 적극적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위비 증액을 위해 우선 다른 분야 예산을 줄이는 세출 조정보다는 국채 발행 등을 해보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하지만 일본의 재정건전성은 미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나쁜 상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1년 기준으로 미국 132.6%, 영국 95.3%인 데 비해 일본은 263.1%에 달한다. 또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국가장기채무 잔고가 1017조1000억엔을 기록해 1000조엔을 첫 돌파했을 정도로 재정건전성에서 나쁜 점수를 받고 있다.
자민당의 기시다 총리가 제안한 내용 중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항목이 ‘적 기지 반격 능력’으로 불리는 타격 능력이다. 적 기지 반격 능력에는 그동안 거론되던 상대의 ‘미사일 기지’ 등에 한정되지 않고 지휘 통제 기능도 포함됐다. 미사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요격만으로는 적의 미사일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반격 능력이 필요하다는 게 자민당의 논리이다. 기시다 총리도 이에 대해 ‘선택지 중 하나’라는 표현으로 검토할 뜻이 있음을 피력했다.
하지만 적 기지 반격 능력에 대해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수십 년간 유지해 온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에 어긋나 일본의 방위 정책이 사실상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방위성은 작년 백서에서 전수방위에 대해 “상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 비로소 방위력을 행사하고, 태양(態樣)과 보유 방위력은 자위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에 한정하는 등 헌법 정신에 따르는 수동적 방위 전략의 자세”라고 설명했다.
자민당은 헌법 개정을 통해 헌법 9조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2014년 이미 헌법 해석을 변경해 ‘집단권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전쟁 가능 국가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염려를 샀다. 여기에 더해 헌법 9조에 자위대까지 명기하면 전쟁 가능 국가로 좀 더 접근해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자민당의 방위력 강화와 관련해 보수 야당인 일본유신회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어 정책공조의 가능성도 있다. 또 ‘적극적 방위 능력’ 보유를 표방하며 방위비를 GDP의 1%로 묶은 기존 틀을 깨고 최고 2%를 목표로 증액해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