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수익이나 임금이 증가하는 선순환에서 2%(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물가상승률) 목표를 안정적으로 실현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의 강력한 금융 완화를 끈기 있게 지속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4월 28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금융정책결정회의가 끝난 후 이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금융정책결정회의를 통해 금융 완화 정책을 유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일본 엔화 가치는 이날 20여 년 만에 최저치인 달러당 131엔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올 들어 일본의 엔화 약세에 대해 일본 경제에 부담을 주는 ‘나쁜 엔저(엔화 약세)’라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본은행은 경기 활성화를 위해 엔저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엔저는 수출 증대와 기업 수익의 확대를 가져오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고 이에 따라 아베 신조 전 총리 정권의 ‘아베노믹스’에서 금융 완화 정책 등을 통해 의도되기도 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올 들어 미국·일본의 금리 차이 확대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엔 약세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 증대를 불러오는 긍정적 효과보다 수입물가 상승, 기업비용 증대, 무역수지 악화 등 경제 충격으로 이어지는 악영향이 더 크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엔화 가치는 지난 2월 말 달러당 115엔 수준이었는데 3월 말에는 121엔대를 거쳐 지난 4월 28일에는 20여 년 만에 최저치인 131엔대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무역 적자 확대와 물가 상승, 경상수지 악화 전망 등 엔저의 부작용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에서도 나쁜 엔저를 인정하는 발언이 나온다. 스즈키 이치 일본 재무상은 지난 4월 “(수입물가 상승을) 가격에 충분히 반영할 수 없거나, 그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나쁜 엔저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고 인정했다.
나쁜 엔저가 일본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드러나는 곳이 무역·경상수지, 물가 상승 등이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원유·원자잿값이 상승한 상황에서 엔 약세까지 더해져 수입 부담이 늘었고 엔저의 수출 증대 효과는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무성이 발표한 지난 3월 무역수지는 4124억엔(약 4조원) 적자로 전년 동기 6156억엔 흑자였던 것에 비해 악화됐다. 전년 동기와 비교할 때 수출은 14.7% 증가한 데 비해 수입은 31.2% 늘었다. 무역수지는 지난 3월까지 8개월 연속 적자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엔 약세에도 일본의 수출이 세계 교역·경제의 회복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닛케이는 글로벌 시장 상황 등을 감안할 때 일본의 무역 적자가 한동안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무역 적자 확대는 수입 대금 지급을 위해 엔을 매도하고 달러를 구매하는 수요로 이어질 수 있어 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엔저의 수출 증대 효과가 낮아진 것은 기본적으로 일본 기업의 경쟁력이 낮아진 데다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이 확대된 영향도 있다.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 비율은 2002년 17.1%에서 2011년 18%, 2019년 23.4%로 확대됐다. BNP파리바증권 관계자는 “일본 내에서는 기업 전체의 생산성이 저하됐다”고 진단했다. 미즈호은행 관계자는 “제조업이 해외로 이전해온 데다 코로나19로 인한 해외 관광객의 유입 효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엔저의 장점을 보기 어려운 상황인 데 비해 단점인 수입물가 상승이 눈에 띄게 됐다”고 분석했다. 무역 적자 확대 등은 경상수지 악화로 이어질 수 있어 일본이 경계감을 높인다. 닛케이는 일본의 연간 경상수지가 42년 만에 적자를 기록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엔화가치를 달러당 130엔, 원윳값을 배럴당 110달러를 가정하면 연간 경상수지는 8조6000억엔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분석했다.
엔저가 기업의 수익성 개선에 미치는 효과도 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와증권이 주요 상장 2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엔화 가치가 달러 대비 1엔 하락 시 경상이익의 상승효과는 2022년 0.43%로 2009년(0.98%)에 비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수입물가 상승이 일본 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도 나쁜 엔저의 한 측면으로 지적된다. 원자잿값 상승과 엔저 등의 영향으로 일본의 4월 기업물가지수(기업 간 거래물가 동향)는 전년 동월 대비 10% 올라 비교 가능한 198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비활력이 크지 않은 일본에서는 기업물가 상승에 따른 비용 증가를 판매가에 전부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에서는 수익성에 대한 걱정이 나온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은 최근 “엔저는 단점뿐이고 일본 전체로 보면 장점이 전혀 없다”며 “엔저가 되지 않도록 (일본 정부가) 재정적으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의 나라 일본에서도 수입물가 상승은 소비자 가격 인상의 압력이 되고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 4월 2022년도(2022년 4월~2023년 3월)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1.1%에서 1.9%로 상향했다. 나쁜 엔저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서도 일본은행은 대규모 금융 완화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도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0% 정도로 유도하기로 하는 등 금융 완화 정책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엔 매도’-‘달러 매수’ 현상이 나타나 엔화 약세로 이어졌다.
일본은행이 금융 완화 정책을 유지하는 주된 이유는 경기 활성화이다. 하지만 이 밖에 과도한 국가부채나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 등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의 국채 잔액은 작년 말 기준 처음으로 1000조엔을 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1년 기준으로 미국 132.6%, 영국 95.3%인 데 비해 일본은 263.1%에 달한다. 재무성 추산으로 금리가 1% 오르면 2025년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엔가량 늘어난다. 금리를 올리면 일본은행이 보유한 막대한 국채의 평가손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나쁜 엔저 주장이 강해지면서 일본은행의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는 “기업이 수입 가격 상승분을 소비자 가격에 충분히 전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번 엔저는 기업 실적에 긍정적이라는 인식을 무너뜨리는 계기”라며 “엔저를 멈추려면 일본은행의 정책 변경이 불가피하고 금리 상승을 용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