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일선 특파원의 차이나 프리즘] 한국 기업에 ‘기회’ 대신 ‘악몽’ 되어가는 시진핑 중국
손일선 기자
입력 : 2021.09.29 15:16:00
수정 : 2021.09.29 15:34:11
한때 중국은 한국 기업들이 군침을 흘리는 시장이었다. 한국 기업들에게 ‘제2의 도약’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많은 국내 기업들이 중국 투자를 단행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중국 시장을 멀리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공장 같은 중국 내 자산을 축소하거나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식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2016년 사드 사태였다. 중국 내에서 반한 정서가 확산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악몽 같은 시절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봄은 오지 않았다. 한국 기업에게 중국 시장은 여전히 겨울이다. 최근 사례들부터 살펴보자.
삼성중공업은 9월 14일 중국 내 생산법인인 영파유한공사를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법인이 소유한 토지 등 자산은 중국 정부가 인수할 예정이며 삼성중공업은 잔여 공정을 연말까지 끝내고 내년 초 인수인계 절차를 마무리할 방침이다. 삼성중공업은 1995년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 영파법인을 설립했다. 하지만 2014년 이후 지속된 조선업 불황으로 중국법인의 물량 배정이 제한돼 고전하기 시작했다. 영파법인은 2015년부터 작년까지 6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결국 삼성중공업은 효율성이 떨어진 영파법인을 철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삼성그룹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중국 내 생산시설 축소에 나서고 있다. 실제 2019년 중국 내 스마트폰 공장을 폐쇄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중국의 개인용 컴퓨터(PC) 생산기지까지 문을 닫았다. 중국 시장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맏형 격인 현대자동차그룹도 중국 사업 구조조정에 착수한 상태다. 중국 내 판매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자동차 생산을 멈춘 공장을 매각하는 등 본격적인 경영효율화에 나선 것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한때 점유율 20%를 찍으며 시장 1위를 달렸지만, 최근엔 0~1%대로 주저앉았다.
현대차는 2016년 사드 사태로 판매량이 급감하기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2016년 판매량(179만 대)의 절반에 못 미치는 약 66만 대를 판매했다. 시장 점유율도 3.5%로 추락했다. 이미 현대자동차는 올해 상반기 베이징 1공장 매각을 결정했다. 베이징 1공장은 현대차그룹의 첫 해외 생산기지다. 상징성이 큰 베이징 1공장 매각을 결정한 것은 중국 내에서 현대차 판매가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1공장은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샹’이 인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중국 내 판매 부진이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 베이징 2공장을 임대하거나 매각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소식통은 “최근 중국에서 샤오미 등 많은 업체들이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면서 현대차 베이징 공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업체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차이나 인사이더(China Insider)’ 전략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해온 SK그룹도 올해 들어 중국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포트폴리오 조정을 하고 있다. SK그룹 중국 지주사인 SK차이나는 지난 8월 중국 렌터카 사업을 일본 최대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에 매각했다. 이번 매각으로 SK그룹은 지난 10년간 중국 시장에서 추진해온 렌터카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SK는 2011년 금호그룹으로부터 금호렌트카를 인수하면서 중국 렌터카 시장에 진출했었다. 당초 SK그룹은 중국의 렌터카 시장의 성장성에 주목하고 SK렌터카를 중국 렌터카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육성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좀처럼 사업이 성장궤도에 오르지 못하면서 결국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SK차이나는 지난 6월 베이징 내 핵심 거점 건물인 베이징SK타워도 중국 허셰건강보험에 매각했다. 중국 사업을 완전히 접은 대기업들도 있다. 롯데그룹은 사드 사태 이후 중국 내 백화점과 마트 등 유통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마트도 피코크 등 일부 제품을 온라인을 통해 중국 내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오프라인 사업은 중국 내 현지 기업에 매각하고 철수한 상태다.
베이징현대 공장 직원이 차량을 조립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는 공장 폐쇄와 인력 감축 등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섰다.
▶삼성 스마트폰·현대차, 점유율 뚝뚝
삼성·현대차·SK, 중국서 사업 철수
이처럼 한국 기업들이 점차 중국과 거리 두기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로는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 저하가 꼽힌다. 실제로 한국 브랜드를 대표하는 자동차·스마트폰·화장품 등 주요 품목의 중국 시장 점유율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한국 브랜드 승용차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2016년 7.7%에서 2020년(1~9월) 4.0%로 3.7%포인트 감소했다. 중국 수입 화장품에서의 한국 점유율은 2016년 27.0%에서 2020년 18.9%로 8.1%포인트 뒷걸음질쳤다.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한국 점유율은 화웨이·샤오미 등 중국 기업의 파상공세로 2016년 4.9%에서 2019년부터 1% 미만으로 추락하면서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 지사 관계자는 “과거 한국 기업 제품은 가격이 서방국가 제품에 비해 아주 비싸지 않으면서도 품질이 우수한 상품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얻었지만 최근에는 기술력이 크게 향상된 중국 현지 기업들에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가성비 측면에서 중국 현지 기업들이 한국 기업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스마트폰의 경우 삼성이 한때 중국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지만 지금은 중국 로컬 기업들의 스마트폰에 시장을 완전히 뺏긴 상태다. 두 번째 이유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미중 갈등이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기업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만큼 중국 사업에 대한 비중 축소 등 다양한 방안을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 기업들에게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중국 사업과 관련된 리스크를 전반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내세우고 있는 ‘공동부유’ 사상도 한국 기업들을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이다. ‘다 같이 잘살자’라는 구호를 앞세워 기업들을 옥죄는 규제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근무하는 한국 기업 관계자는 “중국 사업 실적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미중 갈등, 중국 정부의 무차별적 규제 등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한국 본사에서 중국 사업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고 전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어려움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매출 기준 100대 기업 가운데 중국 매출 공시 기준 30개 대기업의 지난해 대(對)중국 매출은 117조1000억원이었다. 이는 2016년보다 6.9% 감소한 수치다. 중국 매출이 줄면서 30개 대기업의 전체 해외 매출 중 중국 비중은 2016년 25.6%에서 2020년 22.1%로 감소했다. 특히 한국 기업 중국법인의 매출은 2013년 2502억달러(약 261조원)를 정점으로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중국법인의 매출 부진이 이어지자 한국 기업은 2015년 이후 중국 신규 법인과 총인원을 줄이고 있다. 2015년 737개였던 신규 중국법인 수는 2019년에는 467개에 그쳤다. 2015년 49만3000명이었던 중국법인 총인원 수는 2019년 41만4000명에 머물렀다.
이에 기업들의 ‘탈중국’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중국에 진출한 우리기업 480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향후 5년 사업 전망에 대해서 현상 유지(42.9%)하겠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지만 축소(21.0%) 또는 철수·이전(8.0%)의 비중도 거의 30%에 육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