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턴어라운드 Part Ⅴ 중국의 반도체 굴기 | 낸드는 기술 격차 2~3년에 불과, 기술 빼가기 비상… 非메모리는 이미 경쟁자, 중·대만 연합군 넘어서야
김병수 기자
입력 : 2020.01.30 11:07:43
수정 : 2020.01.30 11:08:48
“반도체는 사람의 심장과 같다. 심장이 약하면 덩치가 아무리 커도 강하다고 할 수 없다.”
2018년 4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를 방문한 자리에서 내놓은 일성이다. 바로 ‘반도체 심장론’이다.
중국은 전 세계 반도체 60%를 소비하는 세계 최대 시장이지만, 자급률은 10%대 중반에 머문다. 자연 반도체 분야 무역적자도 누적되고 있다. 이처럼 반도체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중국에는 이렇다 할 반도체 기업이 없다. 중국은 미국과 한국 등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소위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는 배경이다. 이를 위해 2014년 출범한 ‘국가 반도체산업 투자기금(CICF)’ 1기 펀드(1390억위안·23조원)에 이어 지난 7월 더 큰 규모로 2기 펀드(2000억위안·34조원)를 조성했다. 주로 반도체 제조 후공정에 투자된 1기와 달리 2기 펀드는 반도체 장비 및 소재 국산화에 투자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중국이 반도체 굴기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 YMTC의 반도체 생산 공장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IC인사이츠는 보고서에서 “중국이 조만간 생산 물량과 기술 측면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결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우선 중국 반도체 생산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가 D램 생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당장 ‘톱3’ 업체에 전혀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경쟁력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전자 등 메이저 업체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업계에선 그러나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 노력이 서서히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양국 간 기술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시 주석이 방문한 YMTC는 올해 안에 3차원(3D)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겠다고 공언했다. 푸젠진화반도체와 이노트론은 D램 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월 300㎜ 웨이퍼 4만 장 규모 D램 공장 ‘팹1’과 연구개발 설비를 완공했다. 앞으로 월 12만 장 수준까지 생산 능력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칭화유니그룹 산하 낸드 플래시 제조사 YMTC는 독자적인 낸드플래시 양산 기술인 엑스태킹(xtacking) 기술을 적용한 64단 낸드플래시 양산에 최근 들어간 데 이어 90단을 뛰어넘어 내년 128단 생산으로 직행하기로 하는 등 선진 기업과의 기술격차 줄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또한 128단으로 직행해 2023년까지 세계 시장의 20%를 점유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발표했다.
▶중 ‘반도체 굴기’ 견제 나선 미국
사정이 이렇자 미국과 중국 간 신경전도 치열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펀드를 통해 해외 기업의 인수합병(M&A)을 시도할 때마다 미국이 막아서고 있다. 2015년 중국 칭화유니그룹은 세계 3위 D램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을 230억달러에 인수하려다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에서 불허해 실패했다. 칭화유니그룹은 미국 샌디스크 인수도 추진했지만 미국 당국이 이를 정밀 조사하겠다고 밝히면서 무산됐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던 싱가포르 업체 브로드컴이 미 퀄컴을 인수하려 했을 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막아섰다. 결론적으로 미중 무역 분쟁이 한국 반도체 산업엔 방패막이 역할을 했지만 미중 간 1단계 무역 합의가 이뤄진 상황에서 중국 측이 자신감을 가지고 반도체 산업 육성에 과감히 지원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의 천문학적 반도체 투자는 세계 1위 메모리 기술과 생산 능력을 확보한 국내 업체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황민성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은 칭화유니의 D램과 낸드를 하나의 회사로 합치는 그림 아래 향후 정부의 자금지원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선 중국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제조업에서 봤듯이 중국이 정부주도로 자금을 투자해 기술력을 따라오면 그다음부터는 심각하다”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한 때가 1983년이었는데, 10년 만에 일본을 추월했다. 중국은 자국 시장이 크고, 투자 여력이 큰 만큼 더 빨리 한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중국은 최근 꾸준히 대만의 반도체 인력을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업체들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인력과 기술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인력, 기술 유출 등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우한의 국유반도체회사 우한신신을 방문했다.
▶비메모리에선 이미 경쟁자
D램,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 반도체에선 아직 한국 기업의 기술력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설계와 소프트웨어 능력이 필요한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선 이미 한국을 앞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는 2018년 말 기준 1698곳에 달한다. 국내 팹리스(약 150곳)의 11배를 넘는다. 중국 정부가 2025년까지 반도체 분야에 최대 1조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중국 제조 2025’가 나온 뒤 팹리스가 가파르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중국의 글로벌 비메모리 시장 점유율도 함께 올라갔다. 2012년 2.4%에서 2018년 5.0%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5.9%에서 4.1%로 추락했다. 특히 삼성전자가 육성 중인 파운드리 분야에선 중국의 추격이 매섭다. 파운드리 기업인 SMIC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2018년 14나노미터(㎚) 공정을 확보해 제품 양산에 들어갔고 초미세 공정인 극자외선(EUV) 노광 기술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거대 내수 시장을 갖춘 중국이 자국 기업들의 주문을 받아 파운드리 사업을 빠르게 확장하면 삼성전자는 물론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와도 격차를 좁혀나갈 것”이라 전망했다. 이는 한국 반도체 업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세계 비메모리 시장 1위를 하겠다”는 삼성전자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중국 반도체 설계 회사들이 중국 파운드리 업체를 이용할 경우 삼성전자가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가 제품 위주로 파운드리를 진행하고 있는 SK하이닉스도 실적에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업체 관계자는 “현재 한국의 삼성전자와 중국 파운드리 업체의 기술 격차는 5년 이상으로 지금 당장 위협이 되진 않겠지만, 중국이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빠르게 쫓아올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