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정부는 수입차 금지조치를 해제했고, 국내에 최초의 수입차인 메르세데스-벤츠가 등장했다. 개방 첫 해에 판매된 수입차는 모두 10대.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95년에는 제1차 한-미 자동차 양해각서(MOU) 교환을 통해 수입차에 대한 관세와 취득세가 인하됐다. 수입차 대중화 시대를 막고 있던 법적인 테두리가 해제된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때를 시작으로 수입차 시장이 본격 태동을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국내 최초의 수입차 한국법인인 BMW그룹코리아도 같은 해 출범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6년 수입차업계는 10년 만에 누적판매 1만대를 돌파했다.
이런 이유로 1987년이 아닌 1995년을 수입차의 원년으로 자동차업계는 보고 있다. 국내에 본격적인 수입차 시대를 연 시기면서, 한국 최초의 수입차 법인이 출범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수입차는 지난 8월 누적판매 100만대를 넘어서며 대중화시대를 맞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국내에 등록된 전체 자동차 대수 중 약 5%, 승용차 기준으로는 약 6%가 수입차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대중화를 맞은 수입차시장. 그 20년 세월 동안의 변화를 추적해본다.
수입차 100만대 시대
대중화 넘어 양극화로
1억원대 럭셔리카 시대가 왔다!
수입차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과거 5000만~7000만원대 중형세단이 주를 이뤘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7000만원 이상 럭셔리카와 5000만원 이하 엔트리카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판매된 수입차 중 2000cc 이하 차량은 8만3667대에 달했다. 이는 작년 전체 수입차 판매량인 15만6497대의 절반이 넘는 53.5%에 달하는 수치다. 2000cc급 이하인 엔트리급 차량들의 판매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8000만원 이상의 가격대를 자랑하는 럭셔리카 브랜드 판매량 역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재규어랜드로버와 포르쉐, 마세라티, 벤틀리 등 대당 1억원을 넘어서는 고가 럭셔리카들의 판매량도 가파르게 오르는 추세다. 수입차 시장에 양극화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 증가세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국내 수입차 시장은 1995년 한미 자동차 MOU 교환 이후 반짝 성장한 후 곧바로 들이닥친 1997년 외환위기로 고비를 맞았다. 1996년 수입차업계 최초로 1만대(1만315대)를 돌파한 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판매량이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연간 판매량이 1만대를 넘은 적이 없다. 외환위기로 그만큼 고객들의 소비가 위축됐다는 얘기다.
이후 2002년 월드컵 시즌을 맞으면서 수입차 시장 역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2002년 1만6119대가 판매된 수입차는 단 2년 만에 연 2만대(2004년 2만3345대)로 늘어난 뒤 2011년 10만5037대로 연 10만대 시장의 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수입차 대중화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소비자들의 성향 역시 20년 전과 비교하면 달라졌다. 수입차 개방 초기 대형차 및 세단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2010년 이후에는 소형차 시장이 급성장했다. 실제 2002년 수입차 연 판매량 중 15.9%(2563대)에 불과했던 2000cc급 소형차 판매량은 10년 만인 2012년 49.4%(6만4638대)로 증가했다.
서울 강남 3구에 집중됐던 수입차 판매 역시 전국 단위로 넓어졌다. KAIDA의 ‘2013년 수입차 시장 결산자료’에 따르면 ‘강남 3구’로 불리는 강남·서초·송파구의 지난해 신규 등록 수입차는 총 1만2260대였다.
이는 서울 전체 신규 등록 수입차의 38.6%에 해당하는 수치로, 2012년 40.6%와 비교하면 2.0%포인트 줄어든 수준이다. 특히 서울 전체 수입차 증가율이 17.9%를 기록한 가운데 강남구는 4.9%에 그쳐 가장 저조했다. 반면 비(非)강남 지역의 수입차 신규 등록은 크게 증가했다. 구로구는 828대로 전년 대비 40.1%가 늘었고, 관악구와 강북구 역시 각각 35.7%, 34.4%가 늘어났다.
시선을 지방으로 돌리면 수입차 대중화 시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제주(-67%)와 경남(-26%)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증가세를 나타냈다. 특히 세종시와 인천은 각각 147.3%, 57.3%를 기록하며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수입차업체들은 이에 ‘강남 집중 전략’에서 벗어나 지방 신흥부촌을 공략하고 있다.
한 수입차업체 임원은 “서울 경기 지역에 집중됐던 수입차 시장이 지방으로 분산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업체들이 지방 전시장과 서비스센터 확충에 나서고 있다”며 “이제는 수입차업체들이 전국을 무대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프리미엄의 정체 vs 대중·럭셔리카 증가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수입차 시장에 양극화 바람이 불고 있다. 수입차업체들의 주력 모델이었던 중형세단의 성장세가 주춤한 사이, 엔트리카와 럭셔리카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어서다.
한국수입차협회에 따르면 올해 1~5월까지 4000cc급 이상 대형 럭셔리카 차량은 2285대가 판매됐으며 전년 동기 대비(1481대) 54.3%가 급증했다. 수입차협회 측은 연비를 중시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성향과 정부의 환경규제 강화 추세 등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밝혔다.
실제 최근 3년간 4000cc급 이상 수입차의 판매량은 ▲2011년 5019대 ▲2012년 4061대 ▲2013년 3636대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전체 수입차 판매량에서도 4000cc급 이상 수입차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2002년 16.5%로 최고점을 찍은 후 지난해 2.4%로 하락했다.
그러나 올해 1~5월 수입차 판매량을 보면 2000cc 미만 소형차와 4000cc 이상 럭셔리카가 수입차 시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2000cc 미만 차량은 4만1946대를 판매하며, 전년 동기(3만2581대)보다 28.7%가 증가했다. 3000~4000cc급 수입차 역시 전년 동기(7404대) 대비 올해 7086대로 판매가 4.3% 늘었다.
주목할 점은 성장률이다. 2000cc급 이하 수입차와 4000cc급 이상 럭셔리카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데 반해 중형세단이 포진해 있는 2000~4000cc급 수입차는 브랜드별로 성장률이 침체되는 모습이다.
브랜드별로 살펴봐도 2000cc 수입차가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수입차업계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수입차업계 1위 BMW그룹이 지난해 5시리즈와 함께 3시리즈 출시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면, 올해에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신형 C클래스 출시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5000만원대 이하 주력 모델인 폭스바겐 역시 골프와 티구안을 앞세워 한 집안 식구인 아우디를 제치고 수입차 3강으로 치고 나온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4000cc급 모델이 포진해 있는 7000만원대 이상 럭셔리카 시장에서는 벤틀리와 마세라티, 포르쉐가 고속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이중 FMC가 독점 수입하고 있는 마세라티는 올 상반기에만 280여 대를 판매하며 전년 대비 131% 성장했다. 하반기에는 상반기보다 더 많은 400대 이상을 목표로 잡고 있어 700% 이상 성장한다는 방침이다.
벤틀리 역시 비슷한 분위기다. 지난 9월 신형 플라잉스퍼 V8을 출시하며 본격적인 영업모드에 들어간 벤틀리는 올해 7월까지 국내에서 176대를 판매했다. 지난해 75대와 비교하면 134.7% 늘어난 상황이다. 롤스로이스 역시 7월 기준으로 국내에서 26대가 판매됐다. 지난해 19대를 판매했던 것과 비교하면 4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올해 1월 한국법인을 설립한 포르쉐코리아도 7월 기준 1524대를 팔아 지난해 1194대와 대비해 27.6%의 판매성장률을 나타냈다.
수입차업계 관계자는 “고가품 혹은 사치품으로 여기던 수입차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수입차 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며 “과거 벤츠, BMW, 아우디에 집중됐던 쏠림현상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엔트리카와 럭셔리카 시장으로 세분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높은 성장률에도 A/S 등 불만은 여전
수입차시장의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업계에서는 오는 2020년이 되면 수입차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동차산업학회를 비롯한 연구단체에 따르면 수입차 시장은 국내 자동차 시장의 20~35%가 되면 성장기를 끝내고 성숙기를 맞을 것이란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이유로 수입차 시장 확대에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수입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국산차에 비해 부족한 A/S 및 서비스네트워크와 높은 판매가격이 이 같은 불만은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 업계 1위인 BMW그룹코리아는 전국에 39개(미니 포함 시 55개)의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2위인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33개에 불과하다. 한 집안 식구인 폭스바겐과 아우디는 이보다 훨씬 적은 28곳과 23곳의 A/S센터를 운영 중이다. 서비스센터 1곳당 최소 3500여 대 이상의 차량을 수리해야 하는 실정이다.
턱없이 비싼 수리비용 역시 수입차 시장의 성장을 막는 걸림돌이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수입차의 평균 수리비용은 국산차의 5.4배에 달한다. 부품값은 6.3배, 공임비는 5.3배, 도장료 역시 3.4배가 더 비싼 것으로 조사됐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보험업계가 국산차 고객의 보험료로 수입차 수리비를 내준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도 ‘경쟁 심화로 마진이 줄어든 수입차 딜러들이 수리비용으로 이를 메우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다.
수입차 업체들은 이에 대해 “부품 보관기간이 길고, 해외 배송료 등이 포함됐기 때문에 국산차 부품보다 비쌀 수밖에 없다”며 억울해 하는 모습이다. 이에 최근에는 부품값 공개와 A/S 서비스망 확장 등을 통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