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멀지 않은 버지니아주 노폭 항. 미국 최대의 군항이다. 이곳에는 지금 항공모함 트루먼호가 호위함인 미사일 순양함 게티스버그호와 함께 정박해 있다. 지난 2월 페르시아 만으로 출항할 예정이던 승무원 5000명 규모의 이 항공모함은 미국 정부의 예산삭감에 따라 무기한 출항을 연기한 상태다.
#지난 3월 21일 공식 취임한 저스틴 웰비 신임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정부의 예산삭감을 공식 비난했다. 웰비 대주교는 40명의 주교단 명의로 작성한 공개서한과 관련해 정부의 무분별한 예산삭감이 취약계층을 빈곤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서한은 웰비 대주교가 영국 성공회의 수장으로 선출된 뒤 첫 번째 정치적 입장 표명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올해 37세인 다니엘 가르시아는 일자리나 자선을 부탁하며 마드리드 시내를 돌고 있다. 여행자 숙소를 전전한 지 벌써 2년째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인 그는 지게차를 운전하다 금융위기로 직장을 잃었다. 스페인에는 가르시아와 같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현재 스페인의 공식 실업률은 26%를 넘어섰다. 청년실업률은 55%나 된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엔 지난 3월 중순 2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모두가 교사나 경찰, 병원 근로자 등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베른 주 정부는 공공부문 급여를 삭감해 겨우 수지를 맞추고 있다.
긴축 직격탄 민생 강타
지금 세계 곳곳에서 허리띠 졸라매기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에선 금융위기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진행형이고 미국 정부도 불가피하게 긴축에 동참할 태세다. 새로 들어선 중국의 시진핑 정부도 긴축이란 말을 꺼냈고 인도도 재정적자 축소에 나섰다.
어쩔 수 없이 긴축에 끌려가는 나라들도 있다. 통화주권을 상실한데다 있는 돈마저 빠져나가는 남유럽 각국이 대표적이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다.
긴축이 시행되는 나라는 너나할 것 없이 몸살을 앓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유럽 대륙과 주변국이 치르는 통과의례는 처절할 정도다. 금융위기로 망가진 금융시스템이 채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지출마저 줄어들자 문을 닫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현재 유럽 지역의 실업자는 2600만명에 달한다.
유로화 사용권은 아니지만 영국도 비슷한 처지다. 금융위기 이후 영란은행(BOE)은 금융시스템을 살리려 확장적인 금융정책을 폈다. 그러나 시장 신뢰를 단 순간에 회복시킬 정도로 과감한 게 아니라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고 돌아갈 정도의 연명책이었다.
영란은행은 지난해 7월 채권매입 규모를 종전 3250억파운드에서 3750억파운드로 늘렸다. 이 같은 양적완화는 영국경제에 약간의 도움은 줬지만 완전히 활력을 넣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여기에 재정이 받쳐줘야 하는데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이 재정건전만을 의식한 나머지 긴축을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영국 외환 사재기 나타나
지난 2월 25일 무디스는 그때까지 Aaa를 유지했던 영국의 신용등급을 Aa1으로 한 단계 깎아내렸다. S&P나 피치 등급으로 따지면 AA+ 수준이다. 영국의 신용등급이 이처럼 내려간 것은 1970년대 이후 처음이다.
무디스는 영국의 중기 성장전망이 계속 약해지고 있고, 영국 정부가 제시한 긴축 계획으로 볼 때 당분간 성장 전망이 제약을 받을 것으로 보이며, 정부 부채가 계속 늘어나 재정의 충격흡수 능력이 저하되고 있다고 이유를 제시했다. 긴축정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났다.
신용등급이 내려가자 당장 영국인들이 충격을 받았다. 파운드화 가치는 즉시 미국 달러화 대비 2년 반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재정위기로 취약하기 짝이 없는 유로화에 비해서도 1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갔다.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니 부활절을 앞두고 휴가를 떠나려던 사람들이 달러나 유로화 사재기에 나섰다. 영국인들은 80%가량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휴가를 즐긴다. 날씨가 좋은 이탈리아나 스페인 그리스 남프랑스 등이 선호하는 곳이다. 자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자 외국 나갈 때 드는 비용이 추가로 늘어나기 전에 서둘러 외화 바꾸기에 나선 것이다. 영국 휴가객들은 이번 신용등급 강등으로 전년에 비해 10~12% 정도 비용이 더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금을 받아 아예 한 겨울을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지내던 은퇴 생활자들은 전체 생활비가 늘어나게 됐다. 영국 전문가들은 은퇴자들의 생활비가 전년에 비해 8% 정도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역시 파운드화를 유로화로 바꿔서 쓰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운드화가 약세를 보이는 만큼 유가는 상대적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모두 신용등급 강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파이낸셜 타임즈는 최근 “영국은 활동적인 재무장관을 필요로 한다”는 사설을 통해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물러나든지 아니면 경기회복을 위한 정책을 펴라는 주문이다. FT는 이 사설에서 영국이 19세기 이후 가장 저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경제 규모는 2006년 수준에 머물고 있고 2008년에 비해선 3%나 퇴보했다고 공세를 폈다.
여론도 좋지 않다. 영국에선 최근 설문조사 결과 51%가 오스본 재무장관의 경제정책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19%만이 현재의 경제정책이 성공할 것으로 믿었고 24%만이 이것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올바른 정책이라고 믿었다.
오죽했으면 주교단까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은 채 교과서적인 긴축을 고수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을까.
조지 오스본 장관은 재정건전성만을 의식해 긴축을 감행했다. 긴축으로 성장은 지지부진할 것으로 보인다. IMF에 따르면 영국 경제는 지난해 0.2%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올해도 1% 내외의 저조한 성장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해서인지 영국은 지난해 11월 중앙은행 총재까지 외국에서 영입했다. 차기 영란은행 총재로 선임된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는 오는 7월 공식 취임한다. 1964년 영란은행 출범 이후 첫 번째 외국인 총재다.
확장정책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면서도 통화정책위원회를 의도하는 대로 이끌지 못해 성과가 뜨뜻미지근했던 마빈 킹 현 총재의 대타다. 마빈 총재는 지난 2월 채권매입 한도를 4000억파운드로 늘리자고 제안하고도 지지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선 카니 신임 총재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나 여건이 다른 상황에서 그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카니 총재는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의 개입을 최소화하자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장적 통화정책보다 단지 채권사주기 같은 시장 살리기에 주력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경우 신뢰 회복에는 상당기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발상지이자 한때 세계 금융의 중심이기도 했던 영국 경제는 왜 지지부진할까. 마빈 킹 총재가 적지 않은 양적완화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긴축 강조 유럽 도리어 재정 악화돼
답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대륙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IMF는 최근 수정한 세계경제전망에서 경제 규모 세계 4위이며 수출 강국인 독일이 올해 0.6% 성장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1%대로 예상되는 영국의 올해 성장률보다 저조한 수준이다. IMF는 내년에도 이 나라의 성장률이 1.4% 정도로 1.7%인 영국보다 저조할 것으로 내다봤다. BMW나 벤츠 등 명품 자동차를 생산하고 수많은 공산품을 쏟아내는 유럽 최강의 국가가 수출품도 별로 없는 영국보다 저조한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2월 말 외환시장에선 독일의 실업률이 예상을 깨고 갑자기 떨어진 게 이슈가 됐다. 독일 경제가 살아나면 유로존 경제가 회생하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에서였다. 뒤집어 말하면 그 동안 독일 경제가 그만큼 저조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해외에 1조4640억달러나 투자했고 외환보유액도 2500억달러가 넘는 독일의 실업률은 7.4% 전후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동안 긴축을 고수했고 다른 나라에게도 강요했지만 독일의 국가부채는 2012년 말 GDP의 80.5%로 추정되고 있다. 88.7%인 영국이나 83.2%로 추정되는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이다. 사실 스페인은 2011년 말엔 국가부채비율(68.5%)이 훨씬 낮았다. 인접국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고 압도적 우위를 보일 것으로 여겨지는 독일의 경제지표가 수치로는 큰 차이가 없고 성장률도 저조한 것은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수한 긴축정책 때문이다.
독일 내각은 최근 2015년부터 신규 차입을 전혀 하지 않겠다는 예산 계획을 확정했다. 이 초안에 따르면 지난해 171억유로를 차입한 독일 정부는 올해는 64억유로만 차입하고 2015년부터는 균형예산을 유지할 방침이다.
독일은 금융위기가 발발한 이후 자국 내에서 뿐 아니라 EU 회원국에 대해서도 엄격한 긴축을 강요해 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이 유연한 정책을 요구했지만 독일은 철저히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요구했다. 최근 키프로스의 자금지원 요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긴축은 독일엔 정체를, 주변국엔 심각한 역효과만 낳았다. GDP와 대비한 스페인의 국가부채는 2011년 68.5%에서 1년 사이에 83.2%로 급증했다. 이탈리아의 국가부채도 같은 기간 동안 120.1%에서 126.1%로, 프랑스의 국가부채도 86.1%에서 89.1%로 각각 늘었다. 시중 자금이 돌지 않는데 무조건 허리띠만 졸라매라고 강요하니 경기가 급랭해 역내 전체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킨 것이다.
IMF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 인접국 중 프랑스는 0.2% 성장했으나 이탈리아는 2.1%, 스페인은 1.4%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는 정부가 유연하게 대처해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도 오히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줄어든 중국의 경우와 완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럽 각국의 시민들은 EU 집행부에 대해 독일에 끌려다니지 말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헤르만 판 롬파위 EU 대통령이 역내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을 정도다.
실제 EU정상회의가 열리던 지난 3월 중순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 집행부 앞에는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시위를 했다. 이들은 눈발이 흩날리는 것은 아랑곳 않고 수년 동안 이어온 긴축을 끝내고 지출을 확대해 고삐 풀린 실업률을 통제하는데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했다. 노조원들은 물론이고 다수의 경제학자들까지 동참해 긴축이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낳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강요하고 있는 지출 삭감과 세금 인상이 초래한 좌절감이 폭발한 것이다.
현재 유로를 사용하는 17개국은 심각할 정도의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17개국의 실업률은 지난 1월 전 달의 10.8%보다 훨씬 높아진 11.9%에 달했다. 청년층 실업률은 24.2%까지 치솟았다.
마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교조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긴축 정책이 만들어낸 심각한 침체는 지금까지 어떤 경제적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장 클로드 정커 룩셈부르크 수상은 “지금 우리는 사회적 혁명을 맞을 수도 있는 위기를 무릅쓰고 있다는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고 현실을 개탄했다.
그런데도 올리 렌 EU 금융위 집행위원은 오히려 엄격한 긴축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EU의 긴축을 통한 구조조정은 지속적인 경기침체와 실업률을 끌어올려 고통만 크게 할 뿐 효과는 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크루그먼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올리 렌에 대해 ‘끔찍한 렌(Rehn of Terror)’이라며 그가 맹목적으로 긴축에 집착하고 있다며 ‘바퀴벌레 아이디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다행히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취임한 뒤 강력하게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한 덕에 유로존 위기는 다소 완화되는 추세다. BOA메릴린치는 ECB가 앞으로도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유연한 통화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하더라도 위기의 진원인 남유럽으로 돈이 돌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숙제라고 했다.
실제로 최근 키프로스가 구제금융을 요청하자 EU 집행부는 지원 조건으로 예금에 부담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키프로스에선 은행의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졌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엇박자를 보이면서 유럽의 정책효과가 반감되고 있는 모습이다. BOA메릴린치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 유로지역 성장률이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0.5%씩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가 2010년 수준에 머물 것이란 얘기다.
구조적 역효과 불가피한 긴축
문제는 유럽 지도자들이 긴축은 구조적으로 경제를 침체로 빠지게 해 오히려 비용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정책 결정자들은 탁상에 앉아 재정지출을 동결한 채 경제가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게 재정을 건전하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보수적인 정책은 시장의 유동성 결핍 상태를 초래해 거대한 수축의 회오리(spiral of contraction)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런 안이한 정책이 침체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론으로 입증한 바 있다. 통화 공급을 일정하게 묶어 놓으면 실제 경제에선 통화수축이 발생하고 일단 통화가 수축하기 시작하면 잠재생산량이 줄어든다는 것. 중앙은행이 적시에 개입하지 못할 경우 시장은 급격히 믿음을 상실해 엄청난 수축의 회오리로 말려든다는 것이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역시 이런 시각에서 유럽 각국에 대해 긴축 정책 대신 세율을 낮추고 임금을 올리는 확장 정책을 쓰는 게 오히려 위기 극복의 지름길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아베의 확장 정책 지지 늘어나
일본의 아베 정부는 이 같은 크루그먼 교수의 이론을 추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크루그먼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과감할 정도의 확장적인 재정·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그런 점에서인지 크루그먼은 아베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최근 뉴욕 타임스 칼럼을 통해 아베 정권이 벌이고 있는 확장정책은 “고지식한 이론에 사로잡힌 어떤 선진국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특히 일본은 최근의 정책을 통해 이번 금융위기에 따른 타격이 제한적인 수준에 그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제대로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괜찮다는 얘기다.
아베는 취임 전부터 일본은행에 물가상승률 2%를 달성하기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에 나설 것을 주문했고 일본은행은 이에 따라 20조엔의 자금을 집행했다. 아베 행정부는 이와는 별도로 지난 2월 말 10.3조엔의 긴급경제 대책도 내놓았다. 이 외에도 공공사업에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아베 행정부가 제시한 공공투자 규모는 향후 10년간 100조~200조엔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같은 양적확대는 엔화가치를 수직으로 끌어내려 일본 제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달러 당 77엔대에 머물던 엔/달러 환율은 최근 95엔대가 됐다. 불과 5개월여 만에 엔화 가치가 23%나 떨어졌다.
덕분에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은 가격경쟁력이 살아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확장 정책이 일본 기업의 이익을 늘리고 고용을 창출해 결과적으로 정부의 세수를 늘려주고 재정지출 부담은 줄이는 효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실제 2011년에 0.7%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일본 경제는 지난해 2% 정도 성장했고 올해는 1.2% 이상 성장할 것이란 게 IMF의 예상이다. BOA메릴린치는 일본이 지난해 1.7% 정도 성장했고 올해는 1.5% 성장해 지난해와 유사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연준 정책효과 정부가 까먹어
미국에선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과감한 양적완화와 부채에 발목이 묶여 운신이 제한적인 오바마 행정부의 축소재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실 버냉키의 양적완화는 완벽한 승리를 거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FT는 최근 버냉크를 “진정한 마에스트로(그린스펀을 넘어선)”라며 업적에 비해 세간의 인정이 미흡할 따름이라고 극찬했다.
실제로 미국을 대표하는 다우지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초 2008년의 기록을 경신하며 새로운 사상 최고치 기록을 세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폭발하고 이어 리먼 브라더스까지 무너져 미국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자 미국 연준은 단지 최후의 대부자로만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일반은행 역할까지 해가며 금융시스템을 정상으로 회복시켰다.
2008년 11월엔 우선 6000억달러를 투입해 MBS와 정부채 매입에 나섰다. 은행들이 들고 있는 MBS나 국채를 사들이고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시중은행들이 정상적인 금융활동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2009년까지 연준이 사들인 MBS와 채권은 1조7500억달러어치에 달했다. 20010년 6월엔 이 규모가 2조100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연준은 그래도 금융시스템이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자 2010년 11월에 2차 양적완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2011년 상반기가 끝날 때까지 6000억달러어치의 국채를 사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경제의 불안이 보이자 2012년 9월엔 3차 양적완화에 나서서 매달 400억달러까지 MBS를 계속 사들이기로 했다. 이를 통해 은행들이 모기지 지원에 나서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하자는 의도에서다. 연준은 더 나아가 2015년까지 기준금리를 거의 0%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 같은 양적완화는 위력을 발휘해 미국에선 지금 경제가 어느 정도 정상화의 길을 가고 있다. IMF는 미국의 GDP 성장률을 지난해 2.3%에서 올해 2.0%, 내년엔 3.0%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성장률만 보면 내년엔 거의 평년 수준을 회복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BOA 메릴린치는 이보다 약간 보수적으로 잡아 올해 1.5% 내년에 2.6% 성장을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상상을 초월한 과감한 통화정책으로 거의 와해됐던 경제를 살려낸 셈이다. 미국보다 훨씬 양호한 위치에 있던 EU가 긴축정책을 고집하다 헤어나기 어려운 위기를 만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물론 현재 미국 경제가 완전히 정상화 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숙제인 재정위기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16조7000억달러에 달해 15조6000억원 수준인 GDP 규모를 이미 상당한 폭으로 추월해 버렸다. 미 의회와 행정부는 이 때문에 국가부채를 현 수준 이하에서 통제한다는 방침 아래 지출예산을 정하면 자동으로 일정액을 삭감하는 제도를 만든 뒤 이행 여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시퀘스터(Sequester)란 이름의 이 제도는 국방비고 복지비고 가리지 않고 예산의 일정액을 무조건 삭감하도록 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으로 출정할 예정이던 미국 항모 트루먼호가 지금 노폭 항에 묶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제도를 놓고 지금 미국에선 찬반양론이 벌어지고 있다. 시퀘스터가 발효되면 미국 정부는 재정절벽에 부딪치고 이 때문에 회복될 조짐을 보이던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 부담이 생긴다고 버냉키 의장도 지적했다. 그런 만큼 오바마 행정부도 양보하기 어렵다며 공화당과 강하게 맞서고 있다.
폴 크루그먼은 이 같은 현실 때문에 미국 정부가 일본 정도로 과감한 부양책을 구사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책 효과가 떨어질 경우 자칫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중국 새 정부 긴축 불구 긍정효과
세계의 3대 성장엔진인 미국과 유럽을 합쳐 중립이라고 할 때 향후 성장의 키는 중국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세계경제의 성장엔진 구실을 해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최근 중국의 PMI(구매관리자지수)가 저조하게 나오면서 올해 성장이 둔화되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우선 노무라는 중국 정부가 시스템 리스크를 억제하기 위해 올해 고삐를 쥘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노무라는 완화 정책 기조가 유지되고 이 위험들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2013년에 8% 이상의 성장이 가능하겠지만 그럴 경우 인플레이션 때문에 오히려 2014년에 금융위기 위험을 고조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미연에 막기 위해 긴축에 나설 것이란 반어적 표현이다.
리커창 총리가 최근 이런 분석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리 총리는 시진핑 정부 출범 직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재정수입 증가가 둔화되는 것을 감안해 중앙정부의 임금 지출을 축소하고 새 자동차를 비롯한 특전을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월과 2월 중앙정부의 수입이 겨우 1.6% 늘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리 총리는 다만 수입이 정체되더라도 사회복지 프로그램 지출은 증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중앙정부 청사나 게스트하우스 등의 신축은 전면 금지하고 신규 직원 채용을 대폭 줄일 것이며 접대비나 해외여행비 지급도 축소할 것이라고 했다.
리 총리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과도한 중앙정부의 지출이 부채와 낭비를 초래했고 이 때문에 대중의 불만으로 작용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진핑 정부 초기에 무조건적 긴축이 아니라 중앙공무원은 낮은 자세로 임하되 복지지출을 늘려 민심을 얻으려는 정책을 펴는 포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체적 지출 삭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경제엔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기저의 수요를 튼튼히 하고 경제의 불안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 선순환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BOA메릴린치는 현재 나타난 데이터를 볼 때 중국이 다시 재고 축적에 들어간 것 같다며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성장 기조는 확실히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IMF는 올해와 내년 중국의 성장 전망을 8.2%와 8.5%로 잡았고 BOA메릴린치는 8.1%와 7.7%로 보수적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예상대로만 나타나더라도 지난해 성장률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글로벌 경제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위안화의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외환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점 역시 세계 경제에 긍정적 신호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은 올 상반기 중 역외 환시장 개설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강 인민은행 부총재는 “우리는 외환시장을 보다 개방할 것이다. 위안화 환율이 보다 균형을 유지할 것이며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것이다”고 밝혔다.
강요된 긴축·글로벌 자금 유출
많은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통화나 재정긴축을 하고 있지만 타의에 의해서 긴축을 강요당하는 나라들도 있다. 세계의 자금흐름이 이런 극한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엔 개도국에서만 벌어지던 일들이 최근 유럽에서 일어났다.
유로화 출범 이후 독일은 최대 수혜국으로 떠올랐다. 비싼 마르크를 싼 유로로 바꾸면서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한 셈이 됐다. 쉽게 말하면 돈을 엄청나게 찍어낸 것과 같은 효과가 생겼다는 얘기다.
덕분에 독일 기업들은 쌩쌩 돌아갔고 경제는 활황을 구가했다. 주요 기업들이 수출해서 돈을 벌어들였다. 독일 금융기관들은 남는 돈은 계속 이웃 나라로 수출해 독일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했다. 한마디로 독일의 인플레이션을 외국으로 수출한 것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 이탈리아와 스페인엔 덕분에 부동산 붐이 일었다. 독일에서 들어온 돈이 집값을 밀어 올리자 너도나도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장사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자 경쟁적으로 돈을 빌려 집을 지었고 집값은 점점 올라갔다. 이때만 해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경제는 보기 드믄 활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모기지 버블이 터지자 유럽도 긴장했다. 독일 투자자들은 서둘러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넘치던 돈이 갑자기 말라버리자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부동산은 수직으로 급강하했다. 부동산 값이 떨어지자 은행들은 더욱 강하게 돈줄을 죄었다. 자금이 빠져 나가면서 순식간에 건강했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돼지(PIGGS)’ 국가의 간판이 됐다.
한때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2000년대 초 대규모 자금유출로 외환위기를 맞았다. 엄청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이후 조금씩 회생할 기미를 보이던 이 나라 경제는 또 다시 불거진 자금 유출로 회생 의지마저 무너질 정도로 치명타를 당했다.
IMF는 이에 대해 아르헨티나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물가상승률 통계를 속이는 등으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또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제기하는 등 내부의 잘못을 외부로 돌리려 한다고 비판했다.
아르헨티나에선 지난 2011년에만도 215억달러가 빠져나갔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외환유출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 여파로 암시장이 생겨나 달러엔 54%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인도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인도는 지난 2011년 1040억달러의 자금이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IMF는 재정 긴축까지 감안해 인도가 단기간에 과거의 8~9% 성장률로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BOA메릴린치는 인도의 성장률을 올해 6.5%, 내년에 7.5%로 추정했다.
상대적으로 브라질은 외부에서 자금이 유입되면서 헤알화가 강세를 보여 경쟁력은 오히려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IMF는 올해와 내년도 브라질의 성장 전망을 각각 3.5%와 4.0%로 제시했다.
한편 BOA메릴린치는 올해 이머징 아시아 국가들은 비교적 견실한 성장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아세안 각국은 중국으로 들어가던 외국인직접투자(FDI)가 몰리면서 최근 수년간 견고한 성장을 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중국의 노동가능 인구 감소나 고령화가 상대적으로 아세안 국가들의 매력을 높인다는 얘기다. 여기에 중일 영토분쟁도 아세안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했다.
폴 크루그먼·에스토니아 대통령 설전 오페라 된다
폴 크루그먼은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발트해 연안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의 정책을 조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에스토니아의 대통령이 여기에 발끈해 온라인 설전이 벌어졌다. 이것을 미국 작가와 에스토니아의 경제학자이자 작곡가가 우연히 알게 돼 이 사연을 오페라로 만들어 4월 무대에 올린다. 사연을 들어보자.
지난해 6월 크루그먼은 자신의 블로그에 에스토니아 정부의 비용절감 이점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거기엔 “그래, 디프레이션 수준의 끔찍한 슬럼프, 그 뒤 상당한 그러나 아직 불완전한 회복. 이게 경제적 승리를 위한 길인가”라고 썼다.
그러자 투마스 헨드릭 일베스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발끈해 즉각 트위터에 동영상 답변을 올렸다.
“… 우리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동유럽인일 뿐이다. 미개인이다. 그래도 언젠가 우리도 이해할 것이다. 노스트라 쿨파를.”(라틴어로 ‘우리의 잘못’을)
이 결론 없는 논쟁을 들은 미국인 작가가 재미있다고 여겨 오페라 대본을 썼고 에스토니아 출신의 경제학자 겸 작곡가가 곡을 붙여 오페라를 만들었다.
제목은 일베스 대통령의 글에 있는 ‘노스트라 쿨파’이다. 4월 탈린 극장 무대에 오른다는데 세계로 퍼질 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