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올해 10조5000억원을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1953년 설립된 이래 사상 최대 규모다. 작년 투자 규모 8조원보다 무려 30% 늘었다. 투자 증가율만 놓고 보면 삼성그룹의 18%보다 훨씬 높게 늘어났다. 이 같은 투자 규모는 최태원 회장이 신년사를 통해 100조 달성에 안주하지 말고 100조짜리 기업 여러 개를 앞으로 10년 안에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국내 투자 8조8000억원 등 10조5000억원이란 사상 최대의 투자발표를 통해 최 회장은 공격경영 의지를 대내외에 분명히 밝힌 것으로 재계는 해석하고 있다.
사상 최대 투자로 돌파구 마련
SK는 최 회장이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대규모 투자로 미래 기술과 역량 있는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기업의 중장기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지금 SK로서는 내수기반형 사업구조, 규제 사업 중심의 포트폴리오, 글로벌 사업의 부족 등 현재의 한계로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 회장이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고 있다.
SK그룹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매출 100조원을 돌파했다. 10년 전인 2001년 47조9000억원에 불과하던 SK그룹의 매출은 2009년 유가 급락으로 인한 매출 감소를 제외하곤 매년 증가했다. 수출 규모도 10년 전 6조4000억원 규모에서 지난해 40조원을 넘어섰다. 매출 성장 대부분을 수출에서 차지할 정도로 내수는 축소됐다.
성장세를 보면 삼성그룹 등 다른 대기업과 비슷하다. 삼성그룹의 2001년 매출은 127조원. 2009년 200조원을 넘긴 삼성그룹은 지난해 280조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삼성그룹의 순익규모는 2001년 5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30조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SK그룹이나 삼성그룹 모두 지난해 매출이 2001년 매출의 2배를 조금 상회한다. 그럼에도 재계 안팎에서 많은 이들이 삼성보다 SK의 미래를 더 걱정한다.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주력사업인 국내시장에서의 통신과 에너지 사업의 성장 정체, 해외 사업의 부진, 신성장동력의 부재 등이다. 삼성이 휴대폰, 반도체, 가전제품 등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제품군인 이른바 글로벌 프로덕트를 갖고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반면 SK는 그런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최 회장의 고민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주력 사업의 정체 속에서 힘든 해외 사업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SK의 성장과 미래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국내 재계순위 3위 대기업으로서 분명 넘어야 할 큰 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쟁환경 속에서 성장 정체라는 단어가 얼마나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최 회장이 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최 회장은 “앞으로의 SK가 과거 SK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실패해도 문책하지 않겠다”, “글로벌 프로덕트가 없는 SK의 사업구조가 단점이 아니라 기회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강조한다. 최근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사내방송에서도 가장 강조한 부분의 하나라고 SK측은 말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보면 최 회장은 통신과 에너지를 중심으로 내수 위주의 사업구조를 갖고 있는 SK그룹이 글로벌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지 못할 경우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교수)은 “통신과 에너지라는 SK그룹의 두 주축 사업은 모두 내수, 규제 산업이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2008년 9월 3일 울산시 남구 SK에너지 제3 고도화 시설준공식
김 교수는 “해외에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는 것이 SK그룹과 최 회장에게 시급한 문제”라며 “이는 최 회장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지적했다.
SK그룹의 축이 되는 사업은 통신(SK텔레콤)과 에너지(SK이노베이션, 옛 SK에너지)다. 이들 사업은 SK의 미래성장을 담보하는 양대 축이다. 1953년 선경직물로 출발한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를 인수해 퀀텀 점프했고,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 또 한 번 도약했다. 하지만 이들 사업은 내수를 기반으로 성장한 사업이었고 지금 한계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통신·에너지 등 주축 사업 내수시장서 정체
SK C&C 본사
SK의 통신과 에너지 부문은 그동안 국내 시장에서 독보적인 시장점유율로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경쟁사들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통신에서는 아이폰으로 무장한 KT가, 에너지에서는 GS칼텍스가 호시탐탐 1위 자리를 엿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내 정유 시장에서는 이미 GS와 SK가 서로 1위를 다투고 있는 형국”이라는 분석도 흘러나오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으로 확장해보자. 두 사업의 글로벌 시장에서의 위치는 초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통신은 40위권, 에너지는 70위권에 불과하다. 삼성, LG, 현대차 등 다른 대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성적과 비교하면 갈 길이 멀다.
정작 문제는 이들 두 부문 모두 국내 시장에서의 성장 가능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5000만인 상태에서 더 이상 신규고객을 창출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라며 “다른 통신사 가입자 유인이 유일한 방법인데 이때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통신비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상태여서 사업을 발전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쉽지 않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소비자들은 이동통신사들을 대상으로 늘 통신비 문제를 지적해왔다. 앞으로 통신비를 통해서 큰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에너지 부문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소모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유를 전량 수입해 와야 하는 데다 국민정서에 민감한 사업이기에 가격정책이 쉽지 않다는 함정이 있다. 또 통신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권에서 때만 되면 기름값을 건드리는 것도 사업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지난 1월13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기름값이 적정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이어 14일에는 임종룡 기획재정부 1차관이 “기름값에는 가격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면서 “서민생활과 직결되는 바로미터인 만큼 반드시 잡겠다”고 다짐했다. SK 측은 “국내에서 기름 팔아서 돈 버는 시대도 아니고 돈을 벌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SK그룹은 규제가 심한 사업을 두 축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이들 두 사업 부문 모두 글로벌 사업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어려움을 증폭시키는 이유다.
통신과 에너지는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안방을 호락호락 내줄 수 없는 기간산업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국가가 기간산업을 외국 기업에 넘겨주려 하겠는가. 오히려 당장의 수모를 감수하더라도 자체 기술과 설비를 갖추기 위해 모든 국가가 공을 들이고 있다.
규제 심한 중국에서 어려움
최 회장이 중국 상하이 SK네트웍스 스피드메이트를 방문하는 모습.
특히 SK가 오랫동안 공을 들이고 있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에서도 이들 사업을 추진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SK 측도 “규제가 너무 심해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실토했다. 그러면서도 애써 느긋한 표정이다. “원래 중국 사업이라는 것이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는 없다”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끈질기게 사업을 펼쳐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SK가 중국에 공을 들인 지 20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딱히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중국 선전에 10억 달러 규모의 정유시설단지를 지으려던 심천프로젝트의 무산과 철수, SK텔레콤이 보유하고 있던 중국 제2의 통신사 차이나유니콤 지분 전량 매각 등 크고 작은 사업에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중국뿐 아니다. SK는 베트남, 미국 등지에서 펼치던 새로운 사업들도 성과를 보지 못했다.
최 회장도 내심 이 부분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이미 1999년 중국 베이징에서 계열사 CEO들이 모여 ‘중국 중심의 세계화’에 대해 논의하고 연구한 바 있다. 하지만 그후 10년이 넘도록 변한 것이 없다.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SK그룹 계열사 CEO 세미나에서 최 회장은 중국 사업이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계열사 CEO들의 보고에 “10년 뒤에도 같은 말을 할 것이냐”며 중국사업의 고삐를 죄었다.
통신·에너지 사업 부문의 국내 정체와 해외 진출 어려움은 SK에 결정타가 될 수 있다. 두 사업이 모두 SK의 주축사업이며 SK는 이 두 사업으로 성장한 회사기 때문이다. 통신과 에너지 사업이 모두 성장정체에 직면해 있는 지금, SK는 해결 방안으로 도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SK그룹 측은 “해가 갈수록 해외 비중이 높아지고 있고 이는 글로벌 사업 강화의 결과”라며 “매출 200조 300조를 향한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고 강조한다.
해외사업·신성장동력 발굴에 인적·시간적 여유 부족
SK에너지 원유시추선
SK의 또 다른 고민은 신성장동력 발굴과 그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일각에서는 “내수 활황에 너무 취해 신성장동력을 찾는 데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즉 1980년대 에너지와 1990년대 통신은 모두 사업 시기가 맞아떨어진 데 따른 성과로, 두 사업만으로도 SK가 다른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정도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는 것.
SK 측도 이 부분은 인정한다. “양대 사업에 투자하고 역량을 쏟는 데도 힘이 모자랄 지경”이었다며 “대한민국 1등 사업을 이끌어가고 그것에 투자해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고 밝혔다. 즉 신성장동력 발굴과 해외사업을 추진하는 데 인적·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SK 측은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미 1990년대부터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그러나 그것에 매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SK가 신성장동력을 찾는 데 몰두할 수 없게 한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2004년 소버린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SK에 따르면 최태원 회장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미래 먹을거리를 발굴할 것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이 SK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
사업구조 자체가 워낙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데다 선대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경영을 승계한 것, 경영권 위협, 글로벌 금융위기 등 그동안 최 회장을 둘러쌌던 환경들이 악재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룹 내 취약한 지분은 최 회장이 극복해야 할 숙제로 지적되고 있다. 선대 회장이 경영권 승계 작업을 하지 않아 최 회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오너 가운데 지분이 가장 빈약하다. SK C&C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를 통솔하는 데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최태원 회장 외 대주주가 SK C&C 지분 55%를 소유하고 있고, SK C&C는 다시 SK(주)의 지분 31.8%를 소유하고 있다. 지주사인 SK(주) 아래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건설 등 8개 자회사가 있다. 또 SK이노베이션 아래는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루브리컨츠가 자회사로 있다.
SK 측은 “SK C&C 상장으로 지분 문제는 해소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상조 교수는 “SK그룹의 지주사 체제가 마무리된다 해도, SK C&C가 SK텔레콤과 합병한다 해도 이를 해소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SK그룹이 사업구조상 성장동력을 찾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성, 현대차, LG 등 제조업을 토대로 성장한 기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그룹의 사업구조를 변경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 LG, 현대차 등 대부분 대기업도 전혀 새로운 사업을 개척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게 아니라 기존 사업을 토대로 발전과 성장을 이끌어왔다는 것이다. 대기업 중에선 두산 정도가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
최 회장은 이같은 변화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SK에 따르면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글로벌 SK의 모습이 지금처럼 한국에서의 SK와 같은 모양이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강조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업구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현재 정체를 맞고 있는 주력사업이 어떤 경우에도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투자 재원(Seed Money)을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최 회장은 SK에너지에서 2009년 SK루브리컨츠를 분사시킨 데 이어 올해 SK이노베이션을 잔존 법인으로 SK에너지와 SK종합화학으로 분사해 독립경영 체계를 만들었다.
이 같은 사업 기반 구축을 바탕으로 현재 SK가 역량을 집중해 그룹의 성장동력으로 기대하고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자원개발과 신재생에너지 사업이다. SK가 중동이나 중남미 지역에서 자원개발에 집중하고 리튬이온분리막사업(LiBS), 2차전지사업, 태양광사업 등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M&A(인수·합병)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SK는 대부분 계열사를 M&A로 편입시키며 재계순위 3위까지 성장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M&A에 있어서만큼은 절대강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대형 M&A 시장에서 SK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SK브로드밴드(하나로텔레콤), 싸이월드 등 소형 M&A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싸이월드가 한때 히트하기는 했지만 SK브로드밴드의 실적은 기대 이하다. 물론 M&A 시장을 향한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있지는 않다. 최근에는 의료장비 회사인 메디슨을 인수하는 M&A에 들어갔다가 지주회사의 비상장회사 지분요건에 발이 묶여 자진 철회하기도 했다.
현재 SK그룹은 내수시장의 공고화와 신재생에너지 사업, 중국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는 모습이다. 일단 미래성장동력을 찾는 데 집중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기 위해서는 연구개발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올해 사상 최대 투자액인 10조5000억원 가운데 10%에 달하는 1조4000억원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또 해외사업 투자규모도 1조7000억원에 달한다. 채용 규모도 3000명으로 늘려 잡았다.
이 같은 투자 규모는 위기의식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최 회장의 결단의 하나로 해석된다. 최 회장의 의중은 이미 지난해 말 인사와 조직개편을 통해 나타났다.
지난 연말 SK그룹은 재계 안팎에서 소폭에 그칠 것이라던 예상과 다른 인사를 단행했다. SK텔레콤 정만원 사장 대신 하성민 이동통신 부문 사장을 SK텔레콤 대표이사 겸 총괄사장으로 선임했다. 당초 정 사장이 유임될 것이라는 예상을 깬 인사다.
정체 벗어나기… 연말인사·조직개편·과감한 투자
SK는 부인했지만 일각에서 점쳤던 최재원 부회장의 SK텔레콤 대표이사 선임설도 빗나간 인사다. 재계 한 관계자는 “4명의 사장 중 3명을 교체한 것만 봐도 최 회장이 SK텔레콤의 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대기업 인사에서 대표이사 사장을 교체한다는 것은 으레 ‘문책’으로 받아들여진다. 재계에서는 읍참마속의 결단으로 정만원 부회장을 2선 퇴진시켰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만큼 최 회장이 그룹의 주축사업인 SK텔레콤의 부진을 씻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성민 신임사장은 “최 회장이 SK텔레콤의 사업 정체를 우려하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만원 부회장은 대신 신설된 ‘부회장단’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리며 앞으로 SK그룹이 신성장동력을 찾는 데 일조하게 된다.
SK그룹의 연말 조직개편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최재원 수석부회장을 필두로 정만원·김신배·박영호 부회장 등 6명으로 구성된 부회장단이다. SK그룹은 “부회장단은 그룹 경영에 대한 조언과 미래산업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테면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에 비견되는 조직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람이 최재원 수석부회장이다. SK텔레콤 이사회 의장과 SK E&S 대표를 맡고 있는 최 수석부회장은 최 회장의 친동생이다. 친동생을 수석부회장 자리에 앉혀 신성장 엔진 개발 책임을 맡겨 그룹과 각 관계사의 역량을 집중토록 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최근 기업들이 위기 때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있다”며 “최 부회장을 전면에 배치한 것은 SK와 최 회장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며 “이는 시장에서도 반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려울 때 오너 일가를 전진배치한 비근한 사례는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을 들 수 있다. SK의 연말 인사와 조직개편의 가장 큰 틀은 부회장단 신설과 SK에너지를 석유부문과 화학부문으로 분리하면서 SK이노베이션을 신설했다는 것이다.
연말인사와 조직개편에 이어 최 회장은 새해에 10조5000억원 투자를 핵심 내용으로 한 경영계획을 발표해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투자규모를 조금 늘릴 것”이라는 암시가 있긴 했지만 지난해 대비 30% 증가한 10조 이상 투자 규모에 재계는 놀라는 눈치다. “이 정도까지 투자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다. 최 회장의 과감한 투자 결정은 사업 활로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부진불생(不進不生). 즉 ‘나아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수년 전부터 최 회장이 즐겨 쓰는 말이다. 최근 들어 최 회장은 이 말을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최 회장은 평소 사자성어를 자주 써왔다. 신년사에는 늘 사자성어가 등장했다. 지난해에는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한다는 말), 올해에는 붕정만리(鵬程萬里, 붕새를 타고 만리를 나는 것을 뜻하며 먼 길 또는 먼 장래를 이르는 말)라는 말을 사용한 바 있다.
부진불생(不進不生)과 글로벌·하모니
지금 최 회장은 회장 취임 이후 가장 큰 도전을 시작했다. 아버지 고 최종현 회장이 폐암으로 갑작스레 사망하자 1998년 불과 38세의 나이(1960년 수원 출생)로 SK의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최 회장의 나이 어느덧 50이 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최 회장과 SK그룹이 200조 300조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먹힐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이 필요하다. 연말 인사와 조직개편, 연초 대규모 투자계획, 부진불생…. 이 같은 모습을 봐도 최 회장의 심경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최 회장은 지난해 11월11일 G20정상회의 비즈니스 서밋에서 ‘글로벌, 하모니’라는 건배사를 한 바 있다. 비즈니스 서밋에 참석한 글로벌 CEO들과 함께 하자는 의미였지만 건배사에 최 회장의 최근 심경이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됐다.
김상조 교수는 “위기 상황에서 언제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어떻게 조직을 이끌어 가느냐 하는 것이 리더십의 본질이라면 최 회장은 지금 바로 그때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SK그룹의 2011년은 여느 그룹보다 그 의미와 각오가 남다르다. 올 한 해 국내외 사업의 성패에 따라 도약의 발판과 위기설 현실화란 분기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