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무역 분야에서 강대국 간 ‘경제 신냉전’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세계 각국이 핵심 산업 분야의 국내 회귀 전략을 펴고 있다. 진영 대 진영 싸움이 심화하면서 무역 및 공급망 재편 양상도 복잡해지고 있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독자적 공급망 구축, 기술보호를 전략으로 내세운다. 중국 역시 탈(脫)미국이라는 전략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2022년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이런 흐름을 가속화하고 있다. IRA는 부유층과 대기업 증세,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에 골자를 뒀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세액 공제를 받기 위해선 미국 내 생산 비중을 높여야 한다. 사실상 공급망 재구축을 지원하는 법안인 셈이다. 특히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제품은 미국이 자국 내 공급망을 구축하려 혈안이다. 이처럼 미국이 IRA법 실시로 자국 내 투자를 유도하자, EU 역시 유사한 법안을 들고 나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중국은 산업 구조 고도화, 내수 진작으로 맞서고 있다. 반도체와 AI, 차세대 통신기 등 첨단 산업 육성을 위한 대형 투자를 강화하고 있는 것. 미국과 버금가는 시장을 갖추기 위해 내수 진작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앞서 ‘리블록’ 과정에서 서방 국가들의 중국 견제는 중국 이외 지역으로 공급망 재편을 촉진할 수밖에 없고, 중국은 이에 맞서는 형국이다. 따라서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비중이 높고 미중 양국 공급망에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한국 경제로서는 상당한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장기적인 공급망 안정화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비교적 인건비가 낮은 국가에 공급처를 두는 이른바 오프쇼어링(off-shoring) 시대가 저물고 있다. 본국으로 공장을 되돌아오게 하는 리쇼어링(Reshoring), 가까운 국가에서 물품을 조달하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 동맹국에 공장을 짓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등이 동시다발로 일어나고 있다. 대량으로 값싸게 조달받는 것에서 다소 비싸더라도 안정적으로 납품받는 것으로 공급의 무게 축이 옮겨 가고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제조업 수출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수출 비중이 국내총생산의 2배에 달하는 만큼 어떤 스탠스에 서는 게 가장 국익에 도움이 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인 셈이다. 우리 정부 고민이 클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실제 미국의 첨단 제품 내재화와 중국 산업 구조 고도화 속에서 IT 등 한국 제품의 수출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장 대중국 무역은 적자로 돌아섰다. 더욱이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2023년에는 중간재 수출국으로서의 경제 타격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선 한국 제조업 공동화도 우려한다. 2022년 IRA 시행 이후 한국 대기업들은 미국 주도로 구축되는 공급망에 편승하기 위해 해외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다.
해외 투자를 통한 시장 개척이 이뤄지더라도 국내 제조업의 수혜는 과거보다 작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미중 갈등이 본격화된 2018년부터 해외 투자가 급증, 2019년 전체 투자의 10%를 웃돈다. 과거에는 제조업 전체 투자에서 해외 투자 비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국내 제조업 공동화 속에 한국 경제 외 기업 간 탈동조화 현상도 생기고 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전과 같은 세계화, 자유무역 시대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과거 냉전 시대처럼 극단적인 대립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 분야에서 동맹국 간 협력이 강화되고 지역, 이념 중심 블록 경제로 전환되는 추세다. 정부와 기업의 발 빠른 대응책이 필요한 시기”라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도 리쇼어링을 지원하고 있다. 인건비 등 생산비용을 줄이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현상을 오프쇼어링이라 한다. 리쇼어링은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미 한국 정부는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명 ‘유턴 기업 장려법’을 운영하고 있다. 유턴 기업(국내 복귀 기업)으로 인정받으면 투자 보조금, 법인세 등 세제 감면, 고용 창출 장려금 등 각종 지원 대상이 된다. 여기에 더해 최근 개정안은 해외 진출 기업이라 할지라도 국내 기존 공장·사업장 내 유휴 공간에 설비를 신규·추가 도입할 때도 유턴 기업과 동일한 대우를 해주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세계 각국이 앞다퉈 ‘리쇼어링(생산시설 국내 복귀)’에 뛰어들고 있다. 저마다 자국에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한국은 정쟁과 지역 이기주의 등으로 생산시설의 착공 시점도 잡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업계에선 기업에 세제혜택 등의 지원을 통한 경제 전반의 고용 수요 개발과 함께 근로자의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22년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창출한 일자리만 3만5000개가 넘는다. 미국이 자국 내 투자 활성화 정책을 통해 리쇼어링을 추진하면서 복귀한 기업 수는 2010년 95개에서 2021년 1300개로 급증했다.
한국도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유턴을 촉진하기 위해 인센티브 정책을 확대하고 있지만 정작 지원 조건이 까다로워 실질적인 성과가 미약한 것이 현실이다. 규제를 피해 사업장을 나라 밖으로 옮긴 기업 입장에서 세금 일부를 감면받고 규제를 잠시 유예해주는 수준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말 한마디에 해외 사업장을 철수하고 본국으로 돌아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편 김기찬 교수는 “미국과 비교적 가까운 동아시아 국가 등을 제2의 전초기지로 두고 제조 공장을 기획하는 국내 기업이 많아질 것이다. 한국과 가깝고 원활한 물류 수송이 가능한 동남아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는 이른바 니어쇼어링(Near-shoring) 현상도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8호 (2023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