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러 등 글로벌 강대국들이 벌이는 신냉전 구도는 2023년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진행형인 신냉전이라고 불리는 현 지구촌의 블록화는 2차 세계대전이후 나타났던 냉전체제와는 다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극체제하에서 냉전 구도가 형성됐지만 21세기 신냉전은 양상이 다소 복잡하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미국 서방이 대립하는 구도 속에서 G2 국가인 중국이 미국과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미국과 중국의 양자 간 대결 구도가 뚜렷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글로벌 공급망 문제가 터지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자원 안보 문제가 동시에 불거지면서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러시아와 미국·유럽이라는 새로운 대립각이 국제사회에 발생했다.
여기에 미국과 껄끄러운 중국이 러시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21세기 신냉전 구도는 미국과 서방 대 중국과 러시아의 대결 국면으로 흘러갔다. 1차 냉전이 양자 구도였다면 지금은 다자적 성격도 가미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상황이 묘하게 변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무조건 한배를 탔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다소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양측은 동중국해 인도양 등에서 합동 해상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사적 공조를 보이곤 있지만, 중국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실질적 지원은 없다. 2022년 2월 시진핑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만난 자리에서도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언급은 없었다.
중국의 스탠스는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된 후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중국은 2022년 말 자국 기업이 설계한 반도체의 수출을 금지했는데, 러시아를 겨냥했다는 말이 파다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후 미국 등 서방의 제재 속에 반도체 관련 제품을 중국에 의존해왔는데, 중국의 이 같은 반도체 수출 금지 조치는 러시아는 당혹케 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다만 이는 신냉전의 한 축이 무너졌다기보다 국제 질서를 주도하려는 미국에 독자적 행보로 맞서겠다는 의미라는 분석이 많다. 명분이 약한 러시아와의 밀월보다는 ‘중국 퍼스트’를 우선시하겠다는 것이다. 한 국제문제 전문가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면서 “미국의 국제 질서 재편 움직임에 일부 공동 대응을 할 뿐 신냉전의 축이라고 하기에는 걸림돌이 많다”고 했다.
현재 중국은 최근 미국의 약한 고리를 겨냥해 외교전을 펴고 있는데, 중동에 부쩍 공을 들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2022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전격 국빈 방문하고, 제1회 중국-아랍정상회의와 중국-걸프협력회의에 참가했다. 중동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우방이지만, 최근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 특히 아랍의 맹주이자 오랜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소원함 그 자체다. 이 틈을 중국이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도 중국의 이같은 행보가 싫지 않다.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와 달리 사우디는 시 주석을 극진히 환대했다. 특히 사우디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시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고, 중국이 주권, 안보, 영토의 온전성을 수호하는 것을 지지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중국의 대만 통일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대만 문제는 미중 갈등의 핵심 사안이다.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신냉전의 주요 이유이기도 한데, 이는 대만이 지정학적으로, 또 4차 산업 시대 중요성이 커진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기존 영토 분쟁에서 그 의미가 더 확장된 셈이다. 대만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것은 파운드리 글로벌 1위 기업인 TSMC 때문이다. 이 기업에서 반도체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글로벌 기업들이 힘겨워 한다. 중국이 실제 ‘하나의 중국’을 내세워 대만을 무력 통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글로벌 반도체 대란은 불 보듯 뻔하다.
4차 산업 시대 중요성이 커진 반도체 공급망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나선 미국의 입장에서는 위기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에 올인하는 것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 통신기업인 화웨이 제품의 스파이 사건 의혹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안보 당국에서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특히 전기차·로봇 등 향후 먹거리로 삼으려는 첨단 산업의 경우 더욱 그렇다. 중국이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활용해 안보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정보들을 손쉽게 빼내가는 스파이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동맹국들로 구성된 칩4(한·미·일·대만)를 통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또 TSMC, 삼성전자 등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들에게 미국 내 생산거점을 마련하라고도 했다. 이들 기업의 근거지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산업 자체를 고사시키려는 전략도 펴고 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생산 설비의 중국 수출을 아예 막아 버린 것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새 설비를 들여오지 못하면 개발 능력은 점점 뒤처지게 된다.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일본과 네덜란드뿐인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도 신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미국은 YMTC 등 중국 반도체 기업 36곳에 대해 수출 금지 조치도 내렸다. 중국은 미국의 자비 없는 ‘반도체 옥죄기’에 187조원이라는 대규모 정책 지원을 내놓으며 맞서고 있지만 사정은 녹록지 않다.
미국은 또 중국의 앞마당이었던 아프리카 공략에도 최근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의 사우디 껴안기에 대한 맞대응 격인데, 미국은 8년 만에 아프리카 정상회의를 2022년 12월 개최했다. 미국과 아프리카대륙 자유무역협정(FTA) 기구 간 업무협약(MOU) 체결, 미국 국제개발금융공사의 아프리카 디지털 전환 관련 3억7000만달러 규모 신규 프로젝트 발표 등도 내세웠다. 이 같은 국제 역학 구도 속에서 중·러 밀월이 계속되는 현장도 있다. 바로 동북아다.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북중러 vs 한미일의 대결 구도인데, 신냉전 기류 속 역내 긴장감은 더 커지고 있다.
일본은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에 대해 2022년 말 미국의 사실상 묵인 아래 적기지 반격 능력을 확보했는데, 주변국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중러는 일본과 영토 분쟁도 벌이고 있어, 동북아의 국지적 충돌 가능성은 여느 때보다 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8호 (2023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