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 시장은 2022 프리즈와 키아프(KIAF) 공동개최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으로 전망된다.
9월 2일부터 5일까지 코엑스에서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FRIEZE)와 서울국제아트페어(KIAF·6일까지)가 공동 개최되며 ‘단군 이래 최대 규모 미술장터’가 열린다. 프리즈 서울에 전 세계 110개 화랑·키아프에 164개 화랑이 결집하는 아시아 최대의 아트페어가 탄생하는 셈이다. 세계 미술 시장을 주름잡는 슈퍼 컬렉터들이 전용기를 타고 서울로 총집결한다.
‘프리즈 서울’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면, 도쿄와 싱가포르를 누르고 홍콩의 뒤를 잇는 ‘아시아 미술 허브’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게 된다. 지난 2년간 중국의 홍콩 봉쇄 이후 651억달러(약 85조원·2021년 기준)에 달하는 세계 미술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의 유통 창구였던 홍콩에서 화랑들이 떠나고, 아트바젤 홍콩의 위상이 약화됐다. 이 기회를 맞아 라이벌 도쿄와 싱가포르도 일제히 글로벌 아트페어 개최를 알리며 아시아 맹주를 자처하고 나섰다. 싱가포르는 내년 1월 국제 아트페어 아트SG를 개최하고, 도쿄는 내년 7월 도쿄 겐다이(東京現代)를 창설한다.
파블로 피카소, 술이 달린 붉은 모자를 쓴 여자(1937).
서울은 키아프와 공동으로 개최되는 프리즈 서울을 계약기간 5년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켜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도쿄와 싱가포르는 상대적으로 초고액 자산가가 많고 글로벌 기업 진출도 활발하다. 하지만 아트바젤, 피악(FIAC)과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로 꼽히는 프리즈가 아시아 첫 개최지로 서울을 선택한 이유도 분명하다. 서울은 최근 들어 아시아에서 첫손에 꼽힐 만큼 매력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미술품 취득세가 없는 조세 제도, MZ세대가 신규 컬렉터로 유입되면서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는 시장도 해외 갤러리의 한국행을 부추기는 요소가 됐다.
프리즈 서울이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한국 시장은 3년 안에 2조원대까지 시장 성장을 바라볼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이 이번 아트페어를 계기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국내 작가의 해외 진출 기회도 늘어날 것으로 미술계는 기대하고 있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영향력 있는 한국의 아트페어와 프리즈의 협업은 서울이 글로벌 미술 시장의 허브이며, 한국이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지임을 확인시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슈퍼 화랑과 블루칩 작가의 향연
세계적 화랑들이 집결하는 프리즈 서울의 면면은 화려하다. 슈퍼 화랑들은 소속 거장들의 고가 작품과 최근 뜨는 여성·흑인 작가들 위주로 다채롭게 구색을 갖춰 물량공세에 나선다. 세계 최고 화랑인 가고시안을 비롯해 국내외 화랑 350곳이 참여하는 이 행사에선 데미안 허스트, 애니시 커푸어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을 비롯해 국내 거장과 신진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이 판매된다. 가고시안이 전시하는 작가는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루이스 보네, 마크 그로찬, 알베르트 올렌, 낸시 루빈스, 리처드 세라, 스펜서 스위니, 마크 낸시, 조나스 우드, 게오르그 바젤리츠, 우르스 피셔, 지아 아일리, 에드 루샤, 제니 사빌, 루돌프 스팅겔, 쩡판즈 등이다.
하우저앤워스는 루이스 부르주아, 마크 브래드포드, 조지 콘도, 필립 거스턴, 루치타 우르타도, 라시드 존슨, 마이크 켈리, 피필로티 리스트 등 역사적 작품과 현대 작품을 고루 출품한다. 스테판 프리드먼 갤러리는 여성 그룹전으로 참여한다. 마마 앤더슨, 레일라 바비라이, 사라 볼, 리사 브라이스 등이 출품한다. 마리안 이브라힘 갤러리는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가나 출신 작가 아모아코 보아포 등의 작가를 소개하며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는 캘빈 마커스 개인전으로 부스를 꾸민다.
리만 머핀은 한국 작가 이불과 서도호의 신작 등을 전시하며, 프리즈에 처음 참가하는 부산의 조현화랑은 이배, 박서보, 보스코 소디의 작품을 출품한다. 페로탕은 타바레스 스트라찬의 회화를 개인전 형태로 선보인다. 이 외에도 데이비드 즈워너, 메리언굿맨, 레비 고비, 빅토리아 미로, 타데우스 로팍, 에스더 시퍼 등 세계적 화랑들이 서울로 집결한다.
스위스의 하우저앤워스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조지 콘도의 신작 유화. Red Portrait Composition(2022).
갤러리 18곳이 참여하는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에서는 근현대 미술사의 거장들이 포함돼 박물관 수준의 작품을 선보인다. 1921년 설립된 애콰벨라 갤러리즈는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프랜시스 베이컨, 장 미셸 바스키아, 알베르토 자코메티, 키스 해링, 엘즈워스 켈리, 윌리엄 드 쿠닝, 앙리 마티스, 피에트 몬드리안,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의 작품을 전시한다. 패트릭 리 프리즈 서울 디렉터는 “아시아 첫 프리즈인 만큼 여기에 참가하는 아시아 화랑 비중이 30%가량 된다”면서 “아시아 미술이 세계로 뻗어가는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키아프 서울(9월 2~6일)’엔 17개 국가의 갤러리 164곳이 참가한다. 국내 주요 갤러리를 보면 가나아트는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을 비롯해 전속 작가들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갤러리현대는 한국 전위예술을 선도한 이건용의 대표작 ‘신체 드로잉’ 등을 소개한다. 올해 신설된 키아프 플러스는 미디어아트와 대체불가능토큰(NFT) 등 디지털 아트와 신생 화랑을 조명하는 아트페어다. 11개국 화랑 73곳이 참여하며 상당수는 5년 미만 신생 갤러리로 구성됐다. 세계적 NFT 컬렉션인 ‘지루한 원숭이들의 요트 클럽(BAYC)’과 BAYC NFT의 저작권 활용을 통해 파생된 ‘BAGC Korea(Bored Ape Golf Club Korea) NFT’ 컬렉션이 특별전으로 처음 공개된다. 온라인으로 전시 작품을 감상하는 뷰잉룸도 운영된다.
프리즈 서울에 몰려오는 컬렉터들이 키아프 매출도 올려줄지 국내 화랑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프리즈를 유치한 황 회장은 “올해 키아프 매출이 지난해(650억원)보다 3배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망했다.
2020년 미국 LA에서 열린 프리즈 전시 전경.
이 기간 리처드 암스트롱 구겐하임 관장과 마이클 고반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관장, 수한야 래펄 홍콩 M+ 관장 등이 미술관 후원자 컬렉터들과 함께 찾아 국내 작가 발탁과 더불어 해외 진출 가능성도 기대된다.
이번 아트페어를 발판으로 아시아 미술 허브로 도약한다면 방탄소년단(BTS),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대중문화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서울의 위상을 재정립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K클래식과 함께 고급예술에서도 아시아의 독보적 도시로 우뚝 설 기회를 잡은 것이다.
▶환호 이면에 국내 화랑들 우려도
하지만 이면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국내 수집가들의 해외 작가 선호가 강한 편이라 외국 화랑에 안방을 빼앗길 것이라는 염려다. 겨우 호황으로 돌아선 국내 미술품 수요가 외국 작가와 화랑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면 미술 시장에 악재가 될 수 있다.
프리즈를 한국 미술을 알리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색화 이후 히트작을 만들지 못한 국내 화랑과 작가들의 분투가 필요하다. 한 국내 화랑 대표는 “최근 급성장한 키아프가 프리즈의 위세에 눌릴 가능성이 있고, 국내 중소형 화랑들은 안방을 외국 화랑들에게 고스란히 내주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특히 국내 컬렉터는 해외 작가 선호가 커서, 향후 국내 전시와 경매가 위축되고 프리즈에만 지갑을 여는 쏠림 현상이 나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로이 릭턴슈타인의 <프로필 헤드> (1988)
실제 프리즈를 코앞에 둔 탓인지 8월부터 국내 양대 경매사의 메이저 경매는 위축된 분위기다. 서울옥션은 오는 23일 ‘제168회 미술품 경매’에 102점을, 케이옥션은 24일 ‘8월 경매’에 101점을 내놓는다. 두 경매사는 1년여의 반짝 호황 이후 국내 금융 시장과 글로벌 미술 시장에 충격이 오면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8월 경매 규모는 경매 전 발표하는 추정가 총액이 서울옥션은 1년 전 173억원에서 125억원으로, 케이옥션은 97억원에서 61억원으로 감소했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8월 초 발간한 ‘상반기 미술 시장 분석 보고서’에서 하락장을 예측하기도 했다. 근거로 경매 시장에서 지난해 열풍이 불었던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 타계 직후 가격이 크게 올랐다 급격히 식어버린 결과를 제시했다. 고 김 화백의 낙찰률은 지난해 1분기 90%대 후반, 낙찰총액은 지난해 2분기 60억원을 넘겼으나 올해 2분기에는 각각 80%대 초반, 10억원대로 떨어졌다.
이런 와중에 국내 경매사들은 글로벌 공룡과의 경쟁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크리스티코리아는 9월 초 작품가액만 5800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전시인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과 아드리안 게니의 2인전을 연다. 크리스티 글로벌 회장 기욤 세루티 등이 대거 방한한다. 소더비는 오는 한국 시장 철수 20여 년 만에 오는 10월 한국 사무소를 다시 연다. 필립스 옥션도 ‘뉴 로맨틱스’라는 그룹전을 연다. 필립스 프라이빗 세일즈 디렉터 헨리 하일리는 “지난해 한국 수집가의 작품 구매가 전년 대비 258%나 성장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줘서 서울에서 첫 기획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BAGC Korea(Bored Ape Golf Club Korea) NFT’
프리즈는 경매 시장에 간접적으로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당장 국내 화랑의 해외 작가 수요는 프리즈에서 일부 잠식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경매 시장도 큰손들의 ‘프리즈 쇼핑’ 여파로 당장 낙찰총액이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프리즈에서 구입한 블루칩 작품들이 향후 수년간 경매 시장으로 다시 유입된다면 10억원 이상 고가 작품의 낙찰이 희소해진 국내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프리즈에서 수십억~수백억원대 작품이 국내 시장에서 충분히 소화된다면, 향후 한국 시장에 제2의 해외 갤러리 진출 러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서울이 아시아 미술 허브로 자리 잡는다면, 제한된 국내 수요를 넘어 아시아 큰손들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한국의 아트페어와 경매에 참여하며 시장의 체력을 키워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직 미지수다. 화랑, 경매사 등의 분위기를 종합해 보건대, 2년 만에 3배 이상으로 급성장한 한국 미술 시장은 ‘프리즈’라는 태풍의 상륙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숨죽여 지켜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