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연말, 한국 가상자산 시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가격보다 ‘문법’에서 먼저 드러났다. 그동안 ‘거래소에서 사고파는 자산’으로만 정리되던 암호자산이, 다시 ‘발행과 유통을 제도권 안에서 설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국내 ICO(가상자산 공개) 금지 기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다. 당국이 ‘무조건 금지’ 대신 ‘정보 공개와 감독을 전제로 허용’이라는 프레임을 공식화하자, 시장은 단번에 눈빛이 바뀌었다. 한국 투자자들이 코인을 바라보는 분위기도 ‘한 번 더 들어가 볼까’ 같은 감정의 문제라기보다, ‘이제 제도권이 판을 다시 짜려는가’라는 구조적 기대 쪽으로 이동했다.
이 변화는 온체인 금융(On-chain Finance)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서막이 된다. 온체인 금융의 본질은 ‘가격이 오를 코인’이 아니라, 다시 돈이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이 흐름의 중심에 있다. 예전엔 거래소 안에서 달러 역할을 하는 보조 자산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결제·정산·담보·단기금리(현금성 수익)로 확장되며 ‘디지털 머니무브’의 핵심 도구로 변모하고 있다. 한국이 ICO를 다시 논의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그럼 결제와 정산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대답의 유력 후보가 스테이블코인이고, 바로 여기서 2026년의 머니무브가 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한국에서 ICO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규제의 기조’를 상징한다. 2017년 이후 사실상 막8년 만에 막혀 있던 국내 발행이 다시 논의된다는 것은, 시장을 바라보는 정책의 언어가 ‘차단’에서 ‘관리’로 옮겨가고 있음을 뜻한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설명자료를 통해 “충분한 정보공개를 전제로 국내 디지털자산의 발행·판매를 허용하고, 해외 발행 후 국내에서 간접 상장되는 관행을 개선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방향은 산업 육성만을 앞세우기보다, 해외에서 발행한 뒤 국내로 우회 유통되는 관행을 개선하고, 국내에서 이뤄지는 발행·판매를 정보공개와 감독 장치로 묶어보겠다는 쪽에 가깝다. 즉 “막아놓으니 밖에서 돌아 들어온다”는 현실 인식이 전제에 깔린다.
이 변화는 투자자에게도 의미가 크다. 발행이 제도권으로 들어오면, 거래·보관(커스터디)·공시·감독이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다. 시장의 ‘리스크 프리미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위험이 어디에 있고 누가 책임지는지에 대한 기준선이 생긴다.
ICO 논의가 ‘발행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은 ‘돈의 문’을 여는 문제다. 한국에서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본격화될수록 초점은 기술이 아니라 권한과 책임으로 수렴한다. 특히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현실 의제로 올라오면, 발행 주체를 은행 중심으로 할지, 비은행(플랫폼·핀테크)의 참여를 어디까지 허용할지가 핵심이 된다.
한국은행과 금융당국은 ‘은행 참여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발행 주체의 구조를 두고 이견을 보이고 있다.
이 쟁점이 단순 산업정책을 넘어서는 이유는,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송금의 마찰을 낮춰 자본 이동의 속도 자체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투자자들이 놓치기 쉬운 포인트가 하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새로운 결제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달러화’가 될 수도 있다. 제도화가 지연되는 동안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국내 이용자의 표준 결제·정산 도구로 자리잡으면, 디지털 환경에서는 원화가 아니라 달러가 ‘디폴트’로 쓰이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반대로 제도권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으면, 국내 결제·정산·송금은 블록체인 기반으로 일부 이동하더라도 통화 질서의 틀 안에서 움직일 여지가 커진다. 그래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쟁은 ‘혁신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통화·어떤 감독 아래서 움직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지점에서 시장 심리는 정책 언어보다 먼저 움직인다. 투자자에게 스테이블코인은 종종 ‘원화→달러 대체 수단’으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환율 변동이 커질 때 대기성 자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정책 당국은 불편해지고 규제 설계의 난도는 높아진다.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을 설명할 때 흔히 “수수료가 싸다”는 문장이 먼저 나온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변화는 ‘시간’과 ‘경로’다. 전통 결제망에서는 해외 송금이나 결제 정산이 며칠 걸리기도 하고, 중간 은행·청산 시스템을 거치며 비용이 누적된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과정의 일부를 단축해 돈이 이동하는 마찰을 낮춘다. 이 마찰이 낮아지는 순간, 개인 투자자의 경험도 달라지지만 기업의 경험도 달라진다. ‘해외에서 돈을 받는 방식’, ‘대금을 결제하는 방식’ ‘정산을 끝내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 자체가 비용 구조를 바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 변화가 제도권 결제의 표준으로 굳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시장이 체감하는 방향성은 분명하다. 스테이블코인은 코인 시장 내부에서의 교환수단을 넘어, 국제송금·결제의 ‘대안 레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개가 늘어날수록 투자자에게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투기 대상이 아니라, 글로벌 자금 이동의 문법을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2026년의 온체인 금융을 이야기할 때, 결국 핵심은 “코인이 오를까”가 아니라 “돈이 더 빨리 움직이게 되는가”로 이동한다.
다만 여기에는 경계도 필요하다. 마찰이 낮아지는 기술은 편리함과 동시에 리스크도 낮춘다. 돈이 국경을 넘어가는 속도가 빨라지면, 정책은 자본 흐름을 관리하기 더 어려워진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의가 늘 결제 혁신과 금융안정 논쟁을 동시에 불러오는 이유다.
한국이 설계도를 그리는 단계라면, 글로벌 시장은 이미 운영 중인 시스템에 가깝다. 그 차이는 ‘규모’에서 먼저 드러난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25년 11월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커졌다고 짚고, 특정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집중도를 함께 점검 대상으로 올렸다. 중요한 대목은 ‘암호자산 시장의 한 구석’이 아니라 금융안정 문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하나의 리스크 항목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이다.
이 변화는 시장의 프레이밍을 바꾼다. 스테이블코인이 커질수록 디페깅(가치 연동 붕괴)이나 대량 환매는 단일 코인의 사고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거래소와 디파이(DeFi) 생태계에서 담보로 활용되거나, 결제·정산 흐름과 연결되면 충격이 전염되는 경로가 늘어난다. ECB가 ‘성장’과 ‘집중’을 함께 다룬 이유는 바로 이 전염 경로 때문이다.
온체인 금융이 자본시장의 중요한 트렌드로 부상하며 글로벌 시장에서는 제도권 플레이어가 이를 비용과 KPI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결제 네트워크에서 나왔다. 비자는 2025년 12월 16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미국 내 스테이블코인(USDC) 기반 정산이 연환산 기준 35억달러를 넘어섰다”라고 분석했다. 스테이블코인이 단지 거래소 안에서 돌아가는 ‘코인 시장의 달러’가 아니라, 정산(volume)이라는 숫자로 관리되는 결제 옵션이 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글로벌 은행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JP모건자산운용은 2025년 12월 퍼블릭 이더리움 위에서 운용되는 토큰화 머니마켓펀드(MONY)를 출시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은행은 프라이빗 체인, 크립토는 퍼블릭 체인”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깨는 데 있다. 은행이 퍼블릭 체인 위에서 ‘수익 상품’을 상품화하기 시작하면, 온체인 금융은 ‘실험’이 아니라 현금성 자산의 새로운 유통로가 된다.
온체인 금융의 위험을 ‘가격 변동’으로만 보면 본질을 놓친다. 2026년에 더 중요한 것은 시스템 리스크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와 담보 체인에 깊이 들어갈수록, 디페깅이나 코인런(대량 환매)은 단일 자산의 문제가 아니라 연결된 시장의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이 점에서 토큰화 자산의 확산은 양날의 검이다. 토큰화된 국채나 단기 상품이 온체인에서 거래되고, 그것이 ‘담보’로 쓰이기 시작하면 금융은 더 효율적이 되지만 동시에 더 빠르게 흔들릴 수도 있다.
그 변화의 상징적 사례 중 하나가 블랙록의 토큰화 펀드(BUIDL)다. 블랙록의 토큰화 펀드 BUIDL은 쉽게 말해 “미국 단기채(국채·현금성 자산)에 투자하는 머니마켓펀드를 블록체인 위 ‘토큰’ 형태로 쪼개 올려놓은 상품”이다. 투자자는 증권계좌에서 펀드 지분을 보유하듯이, 온체인 지갑에서도 BUIDL 토큰을 보유할 수 있다. 겉으로는 ‘새로운 코인’이 아니라 전통 금융의 안전자산을 디지털 포맷으로 바꿔 유통시키는 시도에 가깝다. 이 구조의 핵심은 현금성 수익(단기금리)을 주는 자산을 24시간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런 배경에서 블랙록은 “BUIDL이 단순히 보유하는 상품에 그치지 않고, 일부 기관 대출·거래 구조에서 담보(collateral)로 활용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담보로 쓰인다는 건 의미가 크다. 원래라면 현금이 필요할 때 펀드를 팔아 자금을 만들거나(매도), 금융기관 담보로 인정 받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토큰화된 자산은 ‘팔지 않고도’ 담보로 맡겨 유동성을 끌어오는 방식이 가능해진다. 즉, BUIDL을 들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기반으로 대출을 받거나, 거래 증거금으로 활용하는 식의 ‘자금 조달 레버’가 생기는 셈이다.
여기서 온체인 금융의 성격이 달라진다. 토큰화 자산이 담보 체인에 들어가는 순간, 온체인 금융은 ‘새로운 투자 테마’를 넘어 돈이 굴러가는 방식 자체(자금 조달·증거금·청산의 배관)가 된다. 담보는 금융의 중심이다. 담보가 이동하기 쉬워질수록 자금은 더 빠르게 돌고, 시장 규모는 커질 수 있다.
‘온체인 금융’의 큰 그림에서 토큰증권은 다음 단계의 문장으로 등장한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자산(현금)의 레이어라면, 토큰증권은 투자자산(증권)의 레이어다. 두 레이어가 결합하면 결제·청산이 더 촘촘해지고, 시장은 24/7 형태로 확장될 수 있다. 동시에 규제의 민감도도 높아진다.
로이터는 이에 대해 “SEC가 토큰화 증권이 등록 의무를 사실상 우회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은, 2026년이 ‘혁신의 해’이면서 동시에 ‘규제의 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보도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4호 (2026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