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한국을 바라보는 리스크 요인이 올라간 것은 분명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증시 매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월스트리트의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보고 이러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불거진 ‘코리안 리스크.’ 윤석열 대통령의 거취는 탄핵소추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하면서 헌법재판소에 의해 좌우되게 됐다. 월가에서는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현실화됐다는 점에 놀라는 분위기다. 하지만 계엄사태 이후 빠르게 제도가 작동하며 유혈 사태 등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다. 한마디로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블랙스완’이 출현했지만 성숙한 국력의 힘으로 조기에 이를 바로잡았다는 얘기다. 다만 이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두고두고 한국이 짊어져야 할 부채로 남았다는 평가도 있다.
윤제성 뉴욕생명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월가에서 이번 사태로 인해 한국 시스템 전반을 평가절하 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부 집단의 일탈이 도를 넘었던 것이지 정치 체제 자체가 투자 심리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 CIO는 “월가에서는 돌발 상황에 맞서 차분하게 사태를 진정시킨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이 나오기도 한다”며 “다만 아무리 일회적 일탈이라도 ‘계엄’ 선포가 일시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크게 충격받은 해외투자자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장기적으로 예측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흐름은 워싱턴 정가에서도 공유되는 분위기다. 빅터 차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최근 기고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불확실성에 빠졌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계엄선포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는 부적절한 시점에서 한국에 장기적인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큰 경제·정치적 비용을 치르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폴 공 루거센터 선임연구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1월 취임과 함께 주변국이 신속한 대처에 나설 수 있는 것과 달리 대통령이 탄핵 절차를 밟고 있는 한국은 행보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트럼프가 당장 취임 첫날부터 관세를 매긴다면 나라마다 협상팀을 파견해 관세를 낮추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한국보다 주변국 관계자를 먼저 만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요약하자면 계엄사태와 탄핵사태가 직접 초래하는 경제적 불확실성은 상당 부분 극복했지만, 장기적으로 한국의 불이익을 보는 시나리오가 하나씩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하지만 월가에서는 한국의 기초체력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최근 골드만삭스는 보고서를 통해 국회의 탄핵안 표결 이전에는 한국 증시 변동성이 커졌지만 결국 결과적으로 회복력을 보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 계엄 선포 이후 급락한 원화값 역시 2025년부터는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이는 원화값의 상승보다는 오버슈팅한 달러값의 하락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월가에서는 새해 중반 달러 가치가 정점을 찍은 후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근 모건스탠리는 보고서에서 2025년 말 달러화 가치가 현 수준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블룸버그는 “달러지수는 2024년에만 6% 넘게 상승했는데, 상승분을 시점별로 보면 많은 부분이 트럼프 당선 이후였다. 월가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달러 강세 속도가 브레이크가 잡힐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반면 글로벌 차원에서 달러값에 제동이 걸리더라도 한국의 내부 사정 때문에 원달러 환율이 원화 약세로 굳어질 가능성도 나온다. 한 월가 전문가는 “월가 일각에서는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이어진다면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터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월가 일각에서는 이미 한국 자산에 숏 포지션을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월가 전문가는 “계엄 선포 이후 한국 증시가 하락한 속도를 보면 글로벌 핫머니가 얼마나 이 사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며 “관련된 불확실성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월가의 반응도 일제히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블룸버그는 “한국 대통령이 집권당과 야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한국 자산이 급락했다”며 “깜짝 조치로 인해 정치적 불안과 불안한 한국 경제에 대한 투자자들 우려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웰스파고의 아룹 채터지 전략가는 “최근 몇 주 동안 시장이 트럼프의 새 행정부 하에서 미국의 관세 인상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한 상황인데 한국의 경우 외부 압력에 국내 불확실성까지 추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변동성으로 인해 가뜩이나 취약해진 한국 경제가 미국의 경제 정책 변화로 추가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걸 시사한다.
실제 계엄 직후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된 한국 주요 기업의 주가는 큰 폭으로 출렁이며 변동성이 극대화된 모습이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가결 및 윤 대통령의 계엄 해제 선언 이후 낙폭을 줄였지만, 정치적 불안이 한국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취약성을 보여줬다.
윤 CIO는 “결국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단기적으로 증시와 환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여전히 꽤 있다는 얘기”라며 “하지만 장기적인 영향은 한국의 기초 체력과 제도적 대응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며 향후 투자 전략을 변경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한국 정부의 대응 방식과 국제사회의 반응이 향후 한국 경제와 증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제 다시 공은 정치로 넘어갔다. 한 월가 전문가는 “안정적인 정치 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이 더욱 중요해진 이유”라며 “이는 단순히 경제적 지표의 변동성을 넘어 한국의 국제적 신뢰와 투자 매력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사안이 됐다”고 말했다.
[홍장원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