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가 열리면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으로 떠오른 엔비디아의 수장인 젠슨 황은 대만 출신이다. 대만계 미국인인 그는 여전히 대만 국적을 가지고 있다. 미국 기업인 엔비디아를 이끌고 있는 그의 이중국적은 그동안 크게 관심을 끌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지난 6월 대만에서 열린 정보기술(IT) 전시회 ‘컴퓨텍스 2024’에 참석한 이후에는 상황이 다소 달라졌다. 당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기자들이 세계 과학기술 분야에서 대만의 중요성을 묻자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라고 답했다. 이는 미·중 갈등으로 대변되는 글로벌 역학관계 및 반도체 공급망 이슈에서 상당히 민감한 발언이다.
일국양제를 표방하는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글로벌 흐름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젠슨 황의 이러한 발언은 중국의 눈높이에서는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발언에 대만 사회의 반응은 컸다. 대만에서 젠슨 황의 인기는 ‘젠새너티(Jensanity)’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낼 만큼 독보적이다. 젠슨 황의 젠(Jen)과 광기(Insanity)를 뜻하는 인새너티가 합쳐진 말이다. 이런 그가 대만 내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인 중국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발언을, 그것도 대만의 새 정부가 출범한 직후에 한 점은 보기에 따라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관심을 끈 것은 중국의 반응이다. 당연히 발끈해야 했지만, 중국은 젠슨 황의 대만 국가 발언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주가 지난 후 중국의 대만 담당 기구인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이 낮은 톤의 브리핑을 내놨다. ‘대만=국가’ 발언이 국제사회에서 나올 때마다 보이는 초강경 일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천빈화 대변인은 젠슨 황의 발언에 대해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에 속하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은 역사적 경위와 법리적 사실이 분명하다는 점”이라며 “대만은 이제껏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과거에도 아니었고, 앞으로는 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천 대변인은 “이는 국제 사회의 보편적 공동 인식이자 국제 관계의 기본 상식”이라며 “그가 부디 보충 수업을 잘 받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두고 AI 시대를 이끌어가는 엔비디아의 지정학적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평가한다. 새로운 기술 혁명의 시대를 이끌고 있는 ‘AI 칩’의 파급력이 글로벌 역학 관계에도 영향을 깊이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젠슨 황 본인은 자신의 발언이 지정학적 관련 발언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분위기는 아니다. 리청난 대만 국립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대만에서 태어난 그가 TSMC 등 대만 파트너 기업들에 의존하는 것은 대만의 중요성을 그가 인지하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 주요 기업들과 국가들은 엔비디아의 칩이 없으면 AI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엔비디아 칩 수출 규제 때문에 만성적 공급난에 시달리며 AI 기술 수준을 높이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미국 정부는 2022년 8월 엔비디아가 칩을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규제 조치를 시행했고, 최근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세대 AI에 사용되는 반도체 기술과 관련해서도 대중국 추가 규제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칩 공급 문제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는 미국은 중국이 자국 기업의 기술을 이용해 AI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원천 봉쇄 작전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AI 칩 생산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 엔비디아의 기술력과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중국 기업들은 AI 기술과 관련해서는 엔비디아 칩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고, 중국 당국은 엔비디아 수장의 금기어 발언에도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IT 전문가는 “만일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엔비디아가 그나마 수출하던 물량마저 잠가버린다면 중국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리청난 교수는 “중국이 엔비디아가 필요하지, 엔비디아가 칩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중국은 필요치 않다”고 했다.
중국의 AI칩과 관련한 처지가 얼마나 곤궁한지는 성능 낮은 엔비디아의 물량조차 중국이 수입하는 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에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실제 엔비디아가 중국에서 올해 약 17조원의 매출을 올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해 엔비디아의 중국 시장 전체 매출 103억달러(약 14조2300억원)를 넘어서는 수치다.
반도체 컨설팅 회사 세미애널리시스는 향후 몇 개월 동안 엔비디아가 중국 수출용 H20 반도체를 100만개 이상 공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H20은 미국 정부가 중국에 엔비디아의 첨단 AI 반도체 판매금지 규제를 시행하자, 엔비디아가 중국 수출을 위해 새로 제조한 반도체다. 일부러 성능을 떨어뜨렸음에도 H20의 가격은 개당 1만2000~1만3000달러(약 1658만~1796만원) 수준이다. 중국 내 일부 AI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규제로 엔비디아 칩을 쓰지 못하자 싱가포르 등 인근 국가로 근거지를 옮기는 편법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런 중국의 움직임에 미국은 엔비디아의 칩 수출 규제뿐만 아니라 AI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장비를 만드는 기업들의 대중국 수출도 꼼꼼하게 막아 놨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 노광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ASML이 대표적이다.
국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지정학적 변수 중 전문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중국의 대만 침공이다. 그런데 미·중 간 반도체 경쟁에서 엔비디아의 위상이 커지면서 이 문제는 더욱 민감한 이슈로 번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현재 AI시대를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칩 생산 공급망에서 TSMC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엔비디아가 설계하는 AI칩의 대부분이 TSMC에서 만들어지는데, 아직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글로벌 기업들은 없다. 엔비디아가 스타트업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TSMC는 엔비디아가 원하는 칩을 제대로 구현해 낸다. 엔비디아가 설계하는 최첨단 칩의 생산도 도맡고 있는데, 회사가 야심차게 준비 중인 차세대 AI 반도체 H200도 TSMC에서 생산된다. TSMC는 현재 전 세계 AI 칩의 90%를 만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엔비디아의 지정학적 가치는 대만의 TSMC로 고스란히 이어지는데, 만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이는 글로벌 AI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셈이다.
물론 극히 실현 가능성이 낮지만, 향후 글로벌 패권과도 관계가 있는 AI 주도권에서 미국의 규제 등으로 중국이 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대만 침공 이슈는 여전히 매력적인 카드가 될 수 있다. 대만을 차지한 중국이 TSMC를 이용해 반도체 기술을 끌어올릴 수 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에 대해 TSMC도 이미 대응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마크 리우 TSMC 회장은 지난해 9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대만에 대한 군사 침공이 있다면 TSMC는 아예 생산 시설을 못 쓰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킬 스위치’를 원격으로 작동시켜 시설 자체를 봉쇄해 버리는 극단적 전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공급망에서 또 다른 핵심 회사인 ASML도 만일 시설이 무력으로 점령당할 경우를 대비해 원격으로 제조 장비를 중단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별개로, 대만에서 첨단 반도체를 사실상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상황이 오히려 안보에 있어 방어벽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포브스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대만의 중심적 역할은 종종 ‘실리콘 실드’라고 불린다”면서 “중국에서 필요한 반도체의 70%가 TSMC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 TSMC의 생산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또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TSMC의 가치를 생각할 때 대만의 안보 위협이 발생한다면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글로벌 강대국들이 대만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도 전망한다.
한 지정학 전문가는 “AI 시대를 맞아 당분간 글로벌 지정학의 주요 변수 중 하나가 GPU에 대한 접근성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GPU 인프라에 대한 통제권은 강대국 간에도 기술 주권의 불평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엔비디아의 위상이 커짐에 따라 국제 사회는 규제 조치를 통해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규제당국이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만드는 엔비디아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제재한다는 소식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당국이 엔비디아에 대해 반독점법 위반으로 제재를 가할 경우 이는 전 세계 국가 중 처음 실행하는 것이 된다. 프랑스 당국은 지난해 9월 기업명은 알리지 않고 “그래픽카드 관련 기업의 현지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바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엔비디아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로이터는 소식통을 통해 전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지난해 11월 엔비디아의 지배력이 국가 간 ‘불평등 증가’를 야기하고 공정한 경쟁을 옥죄고 있다고 말했다. 데이터센터에 사용돼 AI 학습과 추론에 이용되는 ‘AI 가속기’시장에서 엔비디아 점유율은 적게는 80%에서 90%까지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분석기관 테크인사이트는 데이터센터 내 엔비디아의 시장 점유율이 98%에 달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 법무부는 엔비디아 측 행위가 경쟁을 저해하는 부분이 있는지 조사할 예정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엔비디아의 반독점 규정 위반 가능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엔비디아를 둘러싼 글로벌 기류변화는 AI 시대 한걸음 늦은 우리 기업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정학(技政學)이란 용어를 강조하는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및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고도로 분업화된 반도체 산업에서 한 기업이 모두 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이에 당시의 최고 수준의 첨단 기술을 반드시 여러 개 가지고 있어야 하고, 특히 소재와 공정의 핵심 요소 기술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HBM 시장에 일찌감치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7호 (2024년 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