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 사업이 현대·삼성·LG·SK 등 주요 대기업의 핵심 미래 먹거리로 부상하면서 주요 그룹 간 협업을 기반으로 한 합종연횡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과거 경쟁 관계로 직접적인 거래가 뜸했던 기업들조차 미래 사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힘을 모으는 모습이다. 코로나19 당시 글로벌 공급망 붕괴를 경험한 데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가속화하면서 새로운 산업 지형이 그려진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완성차 3위 기업으로 도약한 ‘큰손’으로 부상하면서 적극적으로 공급 부품 물량을 차지하려는 삼성, LG, SK 관련 계열사들의 영업 전략도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전기차 핵심인 모터에 LG가 만든 부품을 장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주목 받았다.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기아는 대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EV9에 LG마그나의 모터 부품을 장착했다. EV9은 현대차그룹 전동화 핵심 기술을 총 망라한 주력 제품이다.
모터는 구리선을 감아 만든 전자석(고정자)과 영구자석 역할을 하는 회전자로 크게 구성된다. 이중 LG마그나는 EV9에 고정자 부품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품은 현대모비스를 통해 현대차그룹에 공급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LG그룹이 현대차그룹에 구동의 핵심인 자동차 모터 부품을 공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까다로운 품질 테스트를 거쳐 공급을 확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EV9에 이어 현대차 아이오닉 등 여러 모델에 LG마그나 모터 부품 장착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공급이 큰 이목을 끈 것은 현대차그룹이 계열사를 통해 공급 받아온 핵심 부품을 외부로 ‘아웃소싱’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업계는 과거 내연 기관차가 주류이던 시절 수직 계열화로 핵심 계열사에서만 부품을 공급받은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부품 공급처를 다변화하기 위해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기차 핵심 부품에 대해 LG와 손잡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다. 현대차와 LG의 ‘전장 사업 밀월’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모터 부품 공급에 앞서 두 그룹은 배터리,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 카메라 모듈 분야 등 여러 방면에서 협력해왔다.
자동차 부품 업계 한 임원은 “최근 현대차그룹은 더 다양한 기업으로부터 모빌리티 부품을 공급받고 있다”면서 “과거와 구매 전략이 많이 달라졌음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톱3 완성차그룹으로 우뚝 선 현대차그룹이 소프트웨어중심차(SDV) 전환 등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장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는 LG그룹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해석이다.
전기차 핵심으로 불리는 배터리 협력 관계도 더욱 끈끈해지고 있다. 본격 대량 양산에 들어간 기아 보급형 전기차 EV3에는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합작한 배터리가 장착된다. 이 배터리는 인도네시아 내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 합작 회사에서 만들어진다.
자율주행에서도 현대차그룹과 LG그룹 간 협력이 감지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LG이노텍과 현대차 부품 계열사인 현대모비스가 ‘자율주행의 눈’으로 불리는 라이다에 대한 공동 특허를 3건 출원하고 있다.
라이다는 물체에 적외선을 쏘고 되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거리와 대상을 측정하는 자율주행 핵심 센서를 말한다. 전장사업을 키우고 있는 LG이노텍은 현대차그룹에 오랜 기간 조명, 카메라 모듈 등을 공급해왔다.
LG디스플레이도 차량용 디스플레이를 미래 핵심 사업으로 육성 중인데, 제네시스 일부 차종을 시작으로 고부가 제품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현대차그룹에 공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과 삼성 계열사들의 협업도 가속화하고 있다. 과거 삼성은 완성차 사업에 뛰어든 바 있다. 당시 현대차 그룹과 경쟁관계가 놓였었단 이야기다. 삼성그룹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자동차 사업을 철수했지만 현대차그룹은 삼성이 언제든 완성차 사업에 다시 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리를 뒀다는 후문이 있다.
이 같은 민감한 사업적 영향으로 당시에는 현대차그룹과 삼성과의 자동차 관련 협업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삼성이 완성차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전장 분야를 미래 사업으로 육성하면서 현대차그룹과 접점이 많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삼성 반도체’를 장착한 현대차가 곧 도로를 달릴 전망이다. 지난해부터 삼성전자는 현대자동차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분야에서 첫 협력을 개시했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프로세서인 ‘엑시노스오토’를 현대차에 공급한다는 것이 골자다. 2025년 공급이 목표라고 삼성 측은 밝혔다.
차량용 인포테인먼트는 차 안에 설치된 여러 장비들이 차량 상태와 길 안내 등 운행 관련 정보뿐만 아니라 사용자를 위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함께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삼성 관계자는 “운전자에게 실시간 운행 정보는 물론 고화질의 멀티미디어 재생, 고사양 게임 구동과 같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지원해 최적의 모빌리티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협력의 성과가 가시화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SDI는 2026년부터 2032년까지 7년 동안 현대차가 유럽에서 만드는 전기차에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삼성과 현대차가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은 이게 처음이다. 공급 물량은 전기차 50만대분이다. 금액으로 추산하면 연간 1조원 내외, 7년간 7조~8조원어치 배터리다.
삼성SDI가 현대차그룹에 공급하게 될 제품은 현재 개발중인 고성능 각형 배터리 P6다. 삼성SDI는 P6에 사용되는 양극재 중 니켈 비중을 91%까지 확대하고 음극재는 독자적인 실리콘 소재를 활용해 에너지 밀도를 극대화한다는 방침이다.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면 전기차에서 가장 중요한 차량 주행 거리가 더 길어진다는 장점이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삼성그룹의 전자 부품 계열사인 삼성전기가 현대자동차·기아의 1차 협력사에 선정됐다는 소식도 공식 보도 자료를 통해 공개됐다. 삼성전기는 현대차·기아 차량에 서라운드뷰모니터(SVM)용 카메라와 후방 모니터용 카메라 등을 공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VM용과 후방 모니터링 카메라는 차량 주변 상황을 영상으로 표시하는 주차 지원 시스템에 적용되는 카메라다. 렌즈 접합 부분에 특수 공법을 적용해서 불필요한 빛 유입을 차단해 시인성과 안전성을 확보한 것이 특징이다.
자동차가 전장화되면서 카메라 수요가 매해 크게 늘고 있는데, 삼성전기가 현대차그룹이라는 대형 고객사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SK도 현대차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SK온과 함께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미국에 전기차 배터리셀 합작공장을 세우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SK엔무브는 차세대 차량용 냉매 개발을 위해 공동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와 달리 모빌리티 분야에서 주요 그룹 간 협업이 두드러지는 건 4대그룹 총수 간 돈독한 우애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는 이들 간 미래 사업에 대한 협업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선대 회장에서 재계 내 경쟁 관계가 두드러졌다면, 총수 3세 시대에선 각 그룹별 주력 사업이 구분되면서 협력 모델이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예전에 재계 최고 경영진끼리 만나면 ‘담합’ 문제가 번질 수 있다는 시장의 우려도 사라진 지 오래다.
과거 명분을 중요시 했던 것과 달리 최근 ‘젊은 총수’들은 실리를 최우선 순위에 두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2020년 5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당시 수석 부회장)을 천안 삼성 SDI공장에서 공식적으로 만났다.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 협업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사석에서 편히 만나는 사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두 총수의 회동이 알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정의선 회장과 현대차그룹 최고 경영진은 삼성 SDI와 삼성 종합 기술원 담당임원으로부터 전고체 배터리 기술 동향과 개발 현황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정 회장은 LG화학 오창공장 방문해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두 총수가 두 손을 맞잡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같은 해, 정 회장은 충남 서산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공장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나 SK이노베이션 등이 개발 중인 차세대 배터리 기술과 미래 신기술 개발 방향을 공유했다.
주로 완성차그룹을 이끄는 정 회장이 구심점이 돼 4대 그룹 간 협력을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향후 이들 주요 그룹의 미래 모빌리티를 둔 협업은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분석된다. 4차산업 혁명이 가속화하면 시장이 더욱 세분화되면서 완성차 기업의 수직계열화 구조로는 공급망관리(SCM)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동차가 전장화되면서 내연기관차 중심의 기존 협력사 구조에선 혁신 기술이 많이 나오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각 기업들이 주력으로 하는 사업을 앞세우면서도 국내 기업 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협력은 앞으로 장려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과거 산업계에서 삼성과 LG 사장은 개인적으로는 만나지 않는다는 식의 불문율은 이미 다 깨졌다”면서 “현대차그룹을 중심으로 주요 기업 간 여러 협력과 공동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앞으로 더 다양한 협업 모델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