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1970년대생 최고경영자(CEO)의 시대다. 총수 일가의 3세 경영이 궤도에 오르며 점진적으로 경영진들의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다. 총수 일가 중 대표적인 1970년대생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다. 1970년생인 정 회장은 2020년 회장에 취임한 이후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3로 이끌며 양적 성장에 성공했다.
정 회장은 국내 최초 전기차 전용공장인 기아 오토랜드 광명에서 가진 올 신년회에서 “올해를 한결같고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지속 성장해 나가는 해로 삼아 어려움에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체질을 만들자”고 말했다. 글로벌 불확실성과 무한경쟁 속에서 현대차그룹이 생존하기 위한 화두로 ‘끊임없는 변화’와 ‘지속 성장’을 제시한 것이다. 현대차는 사상 처음으로 2023년 영업이익 15조원 돌파가 예상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국내 상장사 중 14년 연속 영업이익 1위를 수성해온 삼성전자를 밀어내게 된다.
LG그룹 총수인 구광모(1978년생) 회장도 1970년대생이다. 구 회장은 트레이드마크인 ‘선택과 집중’의 큰 줄기 아래 각 계열사의 장점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그룹 내 주력 사업체인 LG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의 선전이 도드라진다. 지난해 경기 부진 속에서도 전장과 배터리를 앞세워 실적 방어에 성공했다.
구 회장은 올 신년사에서 “지난 5년간 고객가치 혁신을 위해 노력하며 높아진 역량만큼 고객의 눈높이도 높아졌고, 모든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객경험 혁신을 이야기하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최고의 고객경험 혁신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차별적 고객가치에 대한 몰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구 회장은 “남들과 다르게의 수준을 넘어 새로운 생활 문화의 대명사가 되는 가치가 차별적 고객가치”라며 그러한 사례로 트롬 스타일러와 건조기, 전기차 배터리, 올레드(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등을 소개했다.
1976년생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에 주력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이 4년 차를 맞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 합병을 최종 승인할 방침이라고 전해지며 산업계의 시선은 남은 2개의 허들, 미국과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1972년생인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도 대표적인 1970년대생 오너 경영자다. 정 회장은 지난해 11월 현대백화점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그룹의 지배구조를 완성하는 동시에 2030년까지 매출 4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정 회장은 올 신년사에서 “올해는 지주회사 체제의 경영 기반을 바탕으로 위기 상황에 대비하고 사업 안정화를 추구하면서, ‘기민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성장 메커니즘의 확립’을 최우선 목표로 다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연말연초 재계의 정기 인사에선 주요 그룹의 ‘세대교체’ 흐름이 뚜렷해졌다. 특히 오너가 3, 4세의 전면 등판이 눈에 띈다. 재계에선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책임 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평가한다. 각 그룹마다 경영 승계를 가속화하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우선 박삼구 금호그룹 전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1975년생) 금호건설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박 부회장은 2002년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상무, 금호타이어 부사장, 아시아나IDT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21년 금호건설 사장에 올랐다. 그동안 관리부문 사장으로 살림살이에만 집중했지만 2년 만에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직접 사업 전반을 챙기게 됐다. 재계에서 “원톱체제가 구축됐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올 3월 주주총회에선 이사회 진입도 예상된다.
철근 누락 사태로 건설업계 논란의 중심에 선 GS건설은 허창수 GS 명예회장의 장남 허윤홍(1979년생) 사장을 GS건설 대표로 선임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오너가가 직접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전문 경영인 대신 4세 경영 시대가 막을 올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2005년 GS건설에서 대리로 시작해 과장부터 부사장까지 직급을 모두 거친 허 대표는 내부 사정에 밝고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인으로 알려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검단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 이후 최악의 시기에 조직을 혁신해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며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혁신의 신호탄이 됐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국토교통부장관 직권으로 내려진 영업정지 8개월 처분은 2월 초 최종 결정될 예정이다.
젊은 총수 일가의 전면 등판이 본격화되며 1970년대생 CEO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삼성, LG, SK, 롯데, HD현대 등 주요 그룹도 50대 리더를 전면에 내세웠다.
가장 먼저 승진 인사를 발표한 LG그룹은 LG이노텍 수장으로 1970년생인 문혁수 부사장을 임명했다. CEO로 선임된 문혁수 대표는 2019년부터 LG이노텍을 이끈 정철동 사장보다 아홉 살이나 젊다. LG이노텍의 전략 및 인수·합병(M&A) 등을 이끌어 온 문 대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졸업한 뒤 1998년 LG전선(LS엠트론)에 입사, 2009년 LG이노텍에 합류했다. 2020년부터 광학솔루션사업부장을 맡아 인공지능(AI), 딥러닝 등 DX기술을 생산 공정에 도입해 제조 경쟁력을 높이기도 했다. 그룹 내부에선 세계 최초 기술을 적용한 카메라 모듈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광학솔루션 사업을 글로벌 1위로 키우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런 이유로 ‘애플통’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LG이노텍은 애플을 주요 고객사로 두고, 매출의 70%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말 임원인사에서 1970년생 용석우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부부장을 사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단 중 이부진(1970년생) 호텔신라 사장을 제외하면 1970년대생은 용석우 사장이 처음이다. 현재까지 삼성전자의 최연소 사장 타이틀은 이재용 회장과 노태문 삼성전자 MX사업부장(사장), 김준우 네트워크사업부장(부장)이 이름을 올렸지만 이들보다 약 1년 먼저 사장에 올랐다. 삼성 내부에서 ‘TV개발 전문가’로 정평이 난 용 사장은 지난 2021년 12월부터 1년간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에서 부사업부장을 역임하며 기술·영업·전략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업 성장을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K그룹은 4명의 60대 부회장단이 공동 퇴진, 지주사와 계열사 자문 등을 맡으며 차세대 리더들을 전진 배치했다. 특히 이번 정기인사에서 1970년대생 대표이사 5명이 새롭게 선임되며 그룹 내 계열사 CEO 중 1970년대생이 4명에서 9명으로 늘었다. 주인공은 김원기(1970년생)SK엔무브 사장, 최두환(1970년생) SK피아이씨글로벌 대표, 장호준(1974년생)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사장, 류광민(1975년생) SK넥실리스 대표, 김양택(1975년생) SK㈜ 머티리얼즈 사장. 기존 유영상(1970년생) SK텔레콤 사장과 박진효(1970년생) SK브로드밴드 사장, 추형욱(1974년생) SK E&S 사장, 윤풍영(1974년생) SK C&C 사장은 모두 유임됐다. 그룹 전체에선 김양택 사장과 류광민 대표가 나이가 가장 어리다. 특히 류광민 대표는 SKC 주요 투자사 중 첫 40대 대표다. 재계 일각에선 “나이에 관계없이 능력 중심인 SK그룹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인사”라고 평가한다. SK그룹은 “오랜 시간 그룹 차원의 차세대 CEO 육성 프로그램을 통해 양성된 새 경영진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준비된 인사를 한 것”이라며 “각 사가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지속 성장하기 위한 전환점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롯데그룹도 1970년생 대표를 대거 선임하며 재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번에 대표이사가 된 우웅조(1974년생) 롯데헬스케어 대표이사(상무)와 김홍철(1970년생) 코리아세븐 대표이사(전무), 최연수(1970년생) 롯데알미늄 대표이사(전무), 홍성준(1972년생) 부산롯데호텔 대표이사(상무), 이원직(1977년생) 롯데바이오로직스 대표(전무)가 모두 1970년대생이다. 롯데 측은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젊은 리더십을 전진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재계 일각에선 롯데지주가 신설하는 미래성장실을 이끌게 된 신유열(1986년생) 전무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의 장남인 신 전무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젊은 인재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그런가 하면 HD현대는 이번 사장단 인사에서 김성준(1970년생) 부사장을 HD한국조선해양의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MIT에서 해양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 대표는 베인앤컴퍼니와 보스턴컨설팅그룹 등에서 근무하다 정기선 부회장이 직접 나서며 HD그룹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현대중공업(HD한국조선해양) 기획 담당 전무로 영입된 후 2020년부터 미래기술연구원장을 역임하며 사실상 그룹의 R&D 분야를 총괄해왔다. 2022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유럽연구센터 설립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에 대한 그룹 내부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미래기술원장 재임 시절 주니어 연구원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리며 직원 복지를 세심하게 챙겼다는 후문이다.
최근 금융투자업계에는 197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영진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 변화는 KB금융부터 하나은행, 신한금융투자, 메리츠화재에 이르기까지 주요 금융기관들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젊은 리더들을 경영진의 전면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KB금융은 경영진 인사를 통해 다수의 70년대생을 전진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변화의 선두에 섰다. 특히 KB국민은행은 신규 임원 24명 중 11명을 70년대생으로 구성했다. 이들 중에는 1977년생인 금융AI센터장 오순영 상무와 같은 여성 임원도 포함되어 있으며, 길광수 본부장은 전통적인 승진 관례를 깨고 L3 직급에서 본부장으로 직행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하나은행은 나이나 직책을 떠나 우수한 성과를 보인 70년대생 팀장급 직원들을 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중 1972년생인 정은혜 디지털채널부 디지털채널운영팀장은 디지털채널본부장으로, 1975년생인 조범준 증권운용부 채권운용팀장은 자금시장그룹장 겸 자금시장 본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증권사들에서도 임원의 나잇대가 낮아지는 추세가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신한금융투자의 경우 상무보 이상의 전체 임원 44명 중 절반 이상이 70년대생으로, 이들이 회사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다.
보험업계에서는 메리츠화재의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된 김중현 사장이 주목받고 있다. 1977년생인 그는 보험업계에서 ‘최연소 CEO’로 불리며,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외국계 경영컨설팅업체 A.T Kerney에서 상무를 역임한 후 메리츠화재에서 변화 혁신을 주도했다. 그와 더불어 교보라이프플래닛의 김영석 신임 대표도 주목할 만하다. 1972년생인 김 대표는 SK바이오사이언스 전략기획실장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글로벌 경영 컨설팅 기업 액센츄어 및 EY한영에서 활동하며 카카오뱅크 설립을 지원한 이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70년대생 리더들의 등장은 금융투자업계도 성과 중심의 경영, 디지털 혁신 등이 강조된 결과”라며 “단순한 세대 교체가 아니라 금융업계의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들의 활약이 앞으로의 금융 트렌드를 이끌어갈 주요 요소가 될 것”이라 분석했다.
[안재형·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