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옮겨갔지만 광화문 일대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중심지다. 한류의 영향으로 글로벌 관광명소이기도 해, 언제부턴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익숙한 풍경이 자리 잡았다. 주말이면 청와대, 경복궁, 인왕산, 북촌, 서촌 등 광화문 일대 명소들에는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인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광화문의 진정한 매력이 이들 명소를 이어주는 길이나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골목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한걸음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우리의 현대, 근대, 근세 역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또 이어진 길들로 발걸음을 이어가면 나만의 광화문 일주 코스도 만들 수 있다. 광화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여행경험이다.
광화문 일주를 위한 정답은 없지만 시작은 인왕산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 좋다.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몰리지만 그래도 번잡하지 않다. 세계 어느 수도에서도 이렇게 도심과 가까운 곳에 산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도심 속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인왕산으로 가는 길은 광화문역을 기점으로 사직단을 향해 가면 된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서울지방경찰청 쪽을 따라가면 나온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사직단은 조선시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 오른쪽 옆을 따라 올라가면 사실상 인왕산으로 가는 시작이다. 가다가 종로도서관 방향으로 틀자. 복잡한 광화문 사거리와는 사뭇 다른 호젓함이 다가온다.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 황학정 국궁 전시관이 등장한다. 전통 활쏘기 체험을 할 수 있지만 예약이 필수다. (길이 헷갈릴 이유는 없다. 곳곳에 표지판이 있다.)
광화문 일주를 위한 방향은 인왕산 자락길이다. 트레킹 코스로 길이 완만해 부담 없이 걷기 좋다. 쭉 걷다보면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호랑이 상을 만나게 되는데, 왼쪽으로는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를 만날 수 있고 오른쪽이 인왕산 자락길이다. 인왕산 정상을 향해 가면 글로벌 도시인들도 등산을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락
길로 접어든다. 여기서도 2가지 선택이 있다. 도로를 따라 걷거나, 숲속으로 난 길을 향하거나. 도착지는 부암동의 윤동주 문학관으로 동일하지만 걷는 도중 느끼는 즐거움이 다르다. 도로를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으면 최근 인왕산 명물이 된 초소책방을 만날 수 있다. 가는 도중에 만나는 전망대(무무대)에서 광화문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인왕산 정상 못지않은 풍경을 제공한다. 초소책방은 1968년 1.21사태(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쓰이던 경찰초소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기존 건물의 철근 콘크리트 골조를 살려 폐쇄적인 공간의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주위 자연을 살려 지어진 덕에 2층 건물의 책방 어느 곳에 자리잡아도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숲길은 인왕산 중턱을 지나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역시 등산보다는 트레킹에 가깝다.
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 트레킹의 묘미를 더한다. 이 코스의 끝에는 청운공원과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좀 더 역동적인 트레킹을 하고 싶다면 문학관 길 건너 있는 북악산 등산로로 접어들어도 된다. 성곽 도성길을 따라 올라가면 1.21사태 당시 청와대 코앞까지 왔던 남파 간첩 김신조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초소책방을 지나쳐 와 커피 한잔의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쉬워 마시라. 이곳에는 33년 된 커피 전문점이 기다리고 있다. 부암동 일대 역시 돌아볼 만한 골목들이 많고 곳곳에 맛집도 숨어있다. 한 이탈리아 음식점은 재벌가에서도 찾는 숨은 맛집으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부암동 곳곳 역시 한때를 보내기에 좋은 매력적인 곳이지만 광화문 일주 코스로 삼기에는 다소 물리적 거리가 있어 따로 찾는 것이 좋다.
이제 방향을 청와대로 향해보자. 윤동주 문학관에서 우회전을 해 쭉 따라 내려가면 청와대 영빈관을 만나게 된다. 개방된 이후 청와대 관람을 위한 이들로 항시 북적인다. 연무관 앞에는 청와대 관람 셔틀버스가 연신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청와대 앞 봉황 조형물, 청와대 사랑채 등이 단골 명소지만, 그 뒤편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이 숨은 관광 맛집이다. 규제 탓에 담벼락을 맞댄 나지막한 건물들이 골목 사이로 자리잡고 있는데, 인근 명소인 서촌이나 북촌과 달리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와대가 용산으로 이전한 후 곳곳에 있던 경호 담당 인력들이 사라져 더 그런 듯하다. 이곳 역시 그 빈자리를 최근 새로 생긴 카페 등이 파고들고 있지만 아직은 여유롭다. 유서 깊은 건물들도 숨어 있다. 이승만정부 시절 민주당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신익희 선생의 고택이 이곳에 있다. 193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으로 ㄱ자형 사랑채와 ㄴ자형 안채가 만나 ㅁ자형 안마당을 이루고 있다. 보통잠겨 있으나 운이 좋으면 문이 열려 있기도 하다.
골목길은 자연스레 효자동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빼먹으면 안 되는 곳이 서촌이다. 경복궁역까지 가지 말고 통인시장 뒷길로 접어들면 빠르게 만날 수 있다. 물론 경복궁역에서도 서촌 진입은 가능하다. 이때 서촌의 명물인 대오서점까지 가는 길은 다소 어색하다. 길 초입에 일본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기 때문이다. 새로 바뀐 모습인데, 이색적이면서도 서촌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익숙한 서촌을 만날 수 있다. 누하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한옥들이 오래된 붉은 벽돌집들 사이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낡은 주택들을 자세히 보면 리모델링을 해 각자 특색을 뽐내는 곳들이 꽤 많다. 유심히 봐야 보이는 곳들이 있어 나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서촌 일대는 트렌디한 맛집들뿐만 아니라 숨은 맛집들도 꽤 많이 있다. 그중 체부동 세종마을 음식문화 거리에 있는 잔치국숫집은 빼먹으면 아쉽다. 주말이면 줄을 서지 않고는 먹지 못할 정도로 인기다. 시장 내에는 다양한 분위기의 먹거리들도 많다. 통인시장과 인접해 있는 달인이 파는 메밀집도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서촌은 예부터 작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 거주했고, 화가 이중섭, 시인 윤동주도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윤동주 하숙집 터, 화가 이상범의 한옥집을 비롯해 근대 양식의 옛 배화학당 본관 건물, 박노수 미술관 등이 들를 만하다.
서촌 투어를 끝냈다면 이제는 북촌으로 향할 차례. 경복궁을 가로질러보자. 광화문 일주 코스에 경복궁이 중심을 차지하지만, 굳이 근정전까지 가지 않아도 경복궁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경복궁의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높은 빌딩이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모습을 오롯이 나타낸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셔터가 바쁘게 움직일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는 장소다.
북촌은 경북궁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있는 지역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를 말한다. 과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고, 지금은 한옥으로 가득한 집들로 유명하다. 하지만 여기에만 매몰된다면 북촌의 한쪽 면만 보는 것이다.
경복궁을 가로질러 후문 쪽으로 나가면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을 만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비롯해 금호미술관과 갤러리현대 등이 줄지어 있다. 또 감고당 길을 따라 근대식 건물 양식인 서울교육박물관 쪽으로 가다보면 송원아트센터도 자리잡고 있다. 서촌이 과거 예술가들이 모여 산 곳이었다면, 북촌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셈이다.
현대 미술작품들을 둘러보기보다 북촌 거리가 더 끌린다면, 송원아트센터에서 가회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TV 등에서 자주 본 북촌의 경사진 한옥 골목(가회동)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북촌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백인제 가옥이다. 북촌 한옥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한옥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2460㎡ 면적의 한옥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정원, 별당채로 이뤄져 있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근대적 변화를 수용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건축에 압록강 흑송이 사용됐다.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집을 지었으며, 이후 언론인 최선익,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등의 손을 거쳤다.
김옥균 집터, 정독도서관 터 등도 인기 코스다.
북촌은 삼청동으로 이어지는데, 전망대 쪽 방향으로 향하면 인왕산과 청와대 춘추관 등 삼청동 일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쓰이는 옛 코리아목욕탕은 언제 봐도 정겹다.
북촌 코스의 끝은 송현공원이다. 서울광장 면적의 3배에 달하는 이 공원은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사택, 광복 후 미군숙소 등으로 쓰인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지난 100여 년 넘게 금단의 땅으로 존재하다 지난해 10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광화문 인근 명소로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중앙잔디광장엔 전망대가, 주변엔 야생화 군락지가 조성돼 있다. 날씨가 좋은날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잔디에 누워서 한때를 즐기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광화문 일주의 마지막 코스는 근대 여행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근대식 건물에 야경이 더해지면 이색 정취가 물씬 풍긴다. 해 질 무렵부터 돌아보면 좋다. 조선일보사 옆에 있는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과 서울주교좌성당부터 시작하면 된다. 3층 건물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이용해 로마네스크 양식과 한국적 건축 기법을 더해 지어 근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성당 앞에 나 있는 좁은 골목은 세종대로로 곧바로 이어지는데, 대로에서 국립정동극장 세실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면 덕수궁 내부에 나 있는 보행로로 접어드는 길을 만나게 된다. 영국대사관 정문과 바로 붙어 있다. 덕수궁 보행길은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지며, 도중에 덕수궁 석조전도 살짝 엿볼 수 있다. 덕수궁 보행길이 끝나고 접어드는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고종의 길을 만날 수 있다. 정동공원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이다. 아관파천 120주년을 기념해 조성됐다. 힘이 없는 국가의 서러움이 고스란히 담긴 곳인 만큼 짧지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 방향으로 접어들면 근대 건물의 향연이다. 정동제일교회부터 정동극장, 이화여고 건물, 옛 신아일보사 별관 등을 지나가면 잠시나마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다.
문수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