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의 원료인 리튬 매장량 세계 1위 국가 칠레가 리튬 산업을 국유화한다. 지난 4월 20일 TV 연설에 나선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리튬은 국가가 통제하는 공공-민간 파트너십으로만 생산될 것”이라며 “이는 단기적인 경제 성장의 기회이자 지속 가능하고 발전된 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선언했다. 칠레가 리튬 관련 국영 회사를 운영하려면 우선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보리치 대통령은 올 하반기까지 입법부에 구체적인 계획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하얀 석유라 불리는 리튬은 거의 모든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원자재다. 최근 전 세계 완성차 시장에서 전기차 비중이 늘며 몸값이 껑충 뛰었다.
블룸버그의 리튬가격지수를 살펴보면 2021년 3월 177.93에서 지난 3월 1026.84로 약 6배나 높아졌다. 사실 리튬 삼각지대라 불리는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은 이미 리튬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높여왔다. 볼리비 아는 지난 2008년 리튬을 국유화했고, 아르헨티나도 올 1월 전략 광물로 지정해 기업들의 채굴권을 중단시켰다. 전 세계 53%의 리튬이 바로 이 삼각지대에 매장돼 있다. 그런가 하면 리튬 매장량 전 세계 10위인 멕시코도 리튬 국유재산화 법안을 정식으로 공포했다. 지난해 리튬 생산 국영기업 리티오멕스(LitioMx)를 설립한 멕시코는 최근 에너지부에 모든 리튬 매장량의 권리를 양도했다.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이른바 글로벌 광물전쟁이 미중 기술패권 경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핵심 광물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자원 안보로 인식되며 화두로 떠올랐다. 보유 자원이 없는 데다 반도체와 배터리가 핵심 전략 산업인 우리나라가 공급망 확보에 실패할 경우 국가 경제가 고꾸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과 배터리 산업
특히 배터리 제조·소재 기업들이 전기차용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를 조달하기 위해 공급망 전쟁에 나섰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에 따라 ‘탈중국 공급망’ 구축이 불가피해지자 원료부터 소재까지 관통하는 ‘밸류체인’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원 민족주의를 불러온 광물 전쟁의 전장으로 배터리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2017년 미국의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슈퍼 301조’로 촉발 된 미중 무역 분쟁이 그 시발점이다. 첨단 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한 기술패권 경쟁의 중심에 배터리 산업이 있다. 지난해 8월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후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더 나은 재건(BBB·Build Back Better)’ 법안과 이를 토대로 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은 미국 내 투자와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반도체, 전기차용 고성능 배터리, 의약품, 희토류의 공급망을 검토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전기차 조립, 배터리 부품, 배터리 광물을 통틀어 자국 중심의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을 구축하고자 한다. 우선 미국 정부로부터 전기차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선 북미 지역에서 전기 차를 조립해야 한다. 배터리 부분은 좀 더 까다로운데, 부품 50% 이상을 북미에서 생산 또는 조달해야 하고 핵심 광물 40% 이상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채굴 또는 정제해야 한다. 이 같은 규제는 2027년까지 해마다 10%씩 높아져 4년 후에는 그 비율이 각각 90%, 80%에 이른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만들어도 부품이나 재료가 중국산이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 중국은 ‘중국제조 2025’ 정책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2015년부터 시행된 이 정책은 개발도상국형 제조업 형태에서 벗어나 제조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전기차 등 10개 제조업 분야를 선별해 집중 육성하고 있는데, 그 핵심 분야가 배터리다.
그리고 중국제조 2025를 통해 급성장한 중국 배터리 기업이 바로 CATL 이다. 미중 양국이 배터리 산업(이차전지), 특히 전기차용 배터리인 리튬 이온 배터리에 주목하는 건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한 몫하고 있다.
여기에 미래 산업의 대표 분야인 전동화, 무선화의 핵심동력이 배터리라는 점에서 주도권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배터리 전문 시장조사기관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전기차 수요는 2019년 232만 대에서 연평균 33%씩 성장해 2030년에는 약 5568만 대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용 배터리 수요 역시 2019년 118GWh에서 연평균 37%씩 증가해 2030년 3647GWh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는 전기차 외에도 에너지저장시스템(ESS), 스마트폰, 인공위성, 태양광 전지 등 충·방전이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만큼 부가가치가 막대하다. 배터리 산업의 패권을 쥐는 국가가 향후 경쟁 우위에 서게 될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일. 배터리 밸류체인의 시작점인 원자재 확보를 위해 전쟁이란 단어가 동원될 만큼 치열해진 이유다.
광물 확보 둘러싼 동상이몽
과거 자원이 많은 국가들은 이를 판매하는 데 주력했고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은 기술 개발에, 한국과 중국은 저렴한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이를 가공, 수출해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화 흐름이 약해지면서 광물을 보유한 국가부터 자국 내 산업 유치에 나서고 있다.
특히 배터리 관련 자원 보유국들이 저렴한 형태의 원재료가 아닌 배터리 제조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고품질의 원자재 가공에 힘을 쏟고 있다. 관련 산업을 구축해 가치사슬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인 인도네시아의 경우 2020년 원광 형태의 니켈 수출을 금지시켰다.
인도네시아는 현재 니켈 채굴부터 가공, 이차전지, 전기차로 이어지는 밸류체인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리튬 매장량 세계 1위인 칠레도 최근 이차전지와 전기차 생산을 추진 중이다. 꾸준한 일조량 덕에 태양광발전이 발달한 칠레는 선진국에 비해 저렴한 전력과 대규모 자원을 무기로 자국 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선진국도 마찬가지. 리튬, 흑연, 니켈, 코발트 등 이차전지에 포함되는 광물자원을 중심으로 31개 광물을 국가 핵심광물로 지정한 캐나다도 전기차 등 관련 제조업 육성에 나섰다. 세계 최대 광물자원을 보유한 호주도 캐나다와 같은 전략을 통해 취약한 제조업 육성과 안정적인 고용 창출 등 두 마리 토끼 사냥에 나섰다.
핵심광물 중국 의존도 여전히 높아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 수입된 수산화리튬 36억6074만달러 가운데 중국에서 수입된 양이 87.8%(32억1616만달러)에 달한다. 수산화리튬은 국내 배터리업계 주력 제품인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에 주로 쓰인다. 호주, 칠레, 중국이 전체 리튬 생산의 90%를 차지하고, 그중 65%가 중국에서 고순도리튬으로 제련돼 수출된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니켈도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한다.
이 밖에 흑연, 코발트의 중국 의존도 또한 90%에 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급선을 다변화하지 않으면 중국발 리스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이미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이러한 리스크를 체감하기도 했다.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해외 경쟁국들은 정부 주도의 공급망 관리체계를 구축한 상황이다.
미국은 백악관과 국가경제위원회 주도로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꾸렸고, 일본은 지난해 8월부터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시행해 11개 특정중요물자에 대해 해외의존도를 완화하면서 5000억엔 규모의 기금을 신설했다. 특히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를 독립된 위원회로 설치해 운영 중이다. 정권 영향을 받지 않고 장기적으로 자원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관련 리포트를 통해 “우리나라의 배터리 공급망은 시장점유율, 기술력, 생산, 품질 측면에서는 우수하나, 소재·원자재 경쟁력은 미흡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라며 “특히 양극재 생산에 필요한 전구체와 리튬(수산화리튬)의 대부분을 중국에 의존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배터리업계의한 전문가는 “경상수지 적자로 달러 공급이 줄면 원화가치가 하락하고 수입물가가 상승한다”라며 “물가가 상승하면 금리가 오르고 금리가 오르면 민간경제가 위축되기 마련인데 광물 전쟁까지 겹친 상황에 민간 기업에만 의지한다면 물가뿐 아니라 수출경쟁력까지 휘청일 수 있다”라고 우려를 전했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