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는 시뮬레이션이나 가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기술 수준이) 400큐비트(qubit·양자비트)의 매우 실제적인 수준까지 도달해 있고, 올해 안에 1000큐비트 수준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아르빈드 크리슈나 IBM 회장이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더욱 회복탄력적인 세계를 위한 기술’ 세션에서 올해 양자컴퓨터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예고하며 내놓은 일성이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중첩과 양자얽힘을 포함한 양자역학 현상을 이용해 연산하는 기계다. 0과 1 중 한 가지만 연산 기본 단위(비트)로 갖는 기존 컴퓨터와 달리 양자컴퓨터는 0과 1의 조합(큐비트)까지 다룰 수 있어 연산 처리 속도가 획기적으로 빠르다. 현재 사용되는 슈퍼컴퓨터 위상을 ‘계산기’ 수준으로 떨어뜨릴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간 인류가 해결하지 못했던 기후변화나 신약 개발, 우주 현상을 비롯한 미래 산업의 ‘게임 체인저’로 양자컴퓨터가 주목받는 이유다. 10억 개의 뎅기열 치료제 후보물질 중 유효물질을 찾아내는 데 5분이 걸렸다는 사례도 있다. 국방이나 대테러 정보 암호해독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양자컴퓨팅은 인공지능이나 딥러닝 알고리즘 등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기업들은 물론 세계 각국이 양자기술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다. 미국 IBM은 지난해 연산 처리 단위를 433큐비트로 늘린 새로운 양자컴퓨팅 프로세서 ‘오스프리’를 공개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IBM은 2025년 4000큐비트 이상의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기 때문에 양자 기술을 경쟁국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은 경제 블록이 기술 헤게모니 중심으로 재편되는 ‘기정학(技政學)’ 구도 속에서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대표적 국가가 미국이다. 구글이나 IBM은 양자컴퓨터와 관련된 연구성과를 크게 보도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대부분 비공개로 한다. 기술개발 로드맵조차 공개하지 않는다.
중국의 추격도 만만찮다. 최근 5년 전부터 중국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펴낸 양자 기술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2025년까지 5년 계획으로 양자 기술 분야에 공적 자금 153억달러(약 19조원)를 투입한다. 이는 같은 기간 72억달러를 투입해 투자 규모 2위를 차지한 유럽연합(EU)의 두 배가 넘고, 19억달러로 3위인 미국보다 8배 많은 수준이다. 4위는 18억달러를 투자하는 일본이 차지했다. 일본 국립 연구기관 이화학연구소(RIKEN)는 2025년까지 슈퍼컴퓨터보다 계산 속도가 1억 배 이상 빠른 양자컴퓨터 상용화에 매진하고 있다.
유럽은 1930년대 양자역학의 발상지이다. 유럽은 이온덫(옥스퍼드대, AQT)·양자점(델프트공대, UCL대)·초전도회로(델프트공대, 율리히연구소)·양자광학(브리스톨대) 기술에서 뒤쫓고 있다. 일본(이화학연구소)·호주(뉴사우스웨일스대) 등도 큐비트 기술을 개발 중이다.
반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2026년 말까지 50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겠다는 로드맵을 공개했다. 현재 국내 양자컴퓨팅 연구인력 역시 261명으로, 중국(2506명)의 10분의 1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우리 양자컴퓨팅 기술은 세계 최고인 미국 수준을 100으로 삼았을 때 77에 그친다. 미국과는 2.4년 기술 격차가 있으며 일본·중국에도 처진다.
김정상 듀크대 교수는 “한국에서 양자컴퓨팅 연구개발(R&D)은 시작이 다소 늦었다. 우리가 갖춘 역량을 활용하지 못하면 세계 기술 경쟁에서 완전히 배제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양자컴퓨터 관련 기술이 각국의 ‘전략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봤다. 아직 양자컴퓨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한 최적화된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차세대 반도체, 통신, 레이저 기술 등이 그 단초를 제공할 가능성이 큰 만큼 최첨단 기술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한국에 아직 기회는 있는 셈이다.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출발이 늦지만 정부 차원의 과감한 지원을 통해 선두 그룹을 따라잡는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20큐비트 양자컴퓨터 시연 시기를 2024년에서 올해 말로 앞당겼다. 50큐비트 양자컴퓨터 구축을 2026년 말까지 마무리하고 2030년에는 500큐비트까지 성능을 높인다는 목표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발표에 의하면 미국과의 기술 격차는 2~3년 정도다. 세계적 선도 연구그룹과 경쟁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수백만 개 큐비트를 집적화하고 동작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황찬용 표준연 양자기술연구소장은 “양자 인력을 양성하려면 졸업 후 연구를 할 수 있게 학교나 연구소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며 “양자컴퓨터의 경우 민간 투자가 필요한데 대기업은 20여 년 뒤 수익이 나는 사업에 투자하기 힘들다. 스타트업 지원 확대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삼성 등 대기업이 양자 분야 투자를 통해 고급 인력 양성에 일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