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제품의 명가’ 폰 포슁거는 1568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설립했다. 비록 규모가 큰 회사는 아니지만 440여 년 동안 유지해온 것만으로도 ‘명가’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하다. 최고 제품을 생산하지 않고서는, 구성원들이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440여 년을 이어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포슁거 가문은 1790년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 가문으로 올라섰다. 현재 유리공장과 삼림, 제재소, 과수원, 농장 등을 운영하며 유리 제조, 임업, 농업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독일 바이에른 지방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유리산업의 본고장으로 꼽혀왔다. 유리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가 풍부했고 산림지대여서 장작도 많았다. 유리 제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찍부터 유리 제조 숙련공들이 바이에른 지방으로 모여든 점도 바이에른 유리산업의 성장에 보탬이 됐다.
바이에른 지방의 유리산업은 대체로 14세기 말~15세기 초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유리공장이 60여 개에 달할 만큼 이 지방의 유리산업은 번창했다. 하지만 지금은 폰 포슁거 하나만 남아 있을 정도로 쇠락한 상태.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홀로 살아남은 폰 포슁거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대부분 유리공장이 문을 닫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다는 것은 폰 포슁거만의 특별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568년 독일 바이에른 산림지대서 출발
비록 회사 설립은 1568년으로 돼 있지만 폰 포슁거 가문의 출발은 13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568년 7월 요아힘 포슁거가 바이에른 지방에서 토지를 매입했는데 그곳에 다 허물어져 가는 유리공장이 있었다. 요아힘 포슁거는 쓰러져가는 유리공장을 재건해 유리 제조 사업을 시작하고자 했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요아힘 포슁거가 유리 제조 사업을 시작하려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더욱이 사업이 망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공장을 재건한다는 것도 무모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요아힘 포슁거는 결단을 내렸다. 유리제품의 명가 폰 포슁거는 그렇게 출발했다. 출발 당시 폰 포슁거의 사업은 그리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로는 거울과 같은 간단한 유리제품에 주력했으며 실적이나 서비스가 업계 평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82년 제2공장을 지은 것으로 봐서는 설립하고 나서 몇 년 후부터 성장세가 두드러진 것으로 짐작된다.
폰 포슁거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건 요아힘의 아들 파울로스 포슁거가 가업을 물려받고 나서다. 1587년 아버지가 강행한 유리 제조 사업을 이어받은 파울로스는 혁신적인 CEO로 평가받고 있다. 평면 형태의 거울이나 유리 등을 만드는 데 치중해 있던 당시 유리산업을 파울로스는 꽃병, 술잔 등 둥글고 속이 빈 제품을 만드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당시만 해도 꽃병, 술잔 등을 제조하려면 첨단 기술이 필요했다. 돈도 많이 들고 새로운 시설을 갖춘 공장도 필요했다. 파울로스는 이 모든 것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결정했다. 그는 막대한 자금을 빌려 첨단기술을 도입하고 공장을 신축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605년까지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부지와 공장을 매각하고 새로운 부지를 매입, 최신식 공장을 건립했다.
첨단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은 파울로스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연구개발이었다. 수년간 연구개발에 힘을 쏟은 결과 마침내 파울로스는 자신이 원하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폰 포슁거의 혁신적인 제품은 비록 고가였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시장을 선도해나갔다. 바이에른 왕실 식탁에 사용될 만큼 품질도 뛰어났다. 그저 그런 유리 제조회사였던 폰 포슁거는 과감한 투자와 첨단기술 도입, 혁신적인 제품 생산으로 단박에 최고 회사로 올라섰다.
이후 폰 포슁거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갔다. 폰 포슁거가 번창하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은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기술 혁신이었다.
폰 포슁거의 최고 전성기는 19세기였다. 1800년대 폰 포슁거는 유리공장을 4곳 더 건립해 가동했고, 거울 가공 공장도 새로 가동하면서 경쟁업체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19세기 폰 포슁거의 제품은 각종 전시회에서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며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치에 올라섰다. 1835년 뮌헨박람회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했다. 특히 1840년에는 폰 포슁거의 제품이 364개의 상을 받으며 최고 제품의 명성을 만천하에 증명했다.
전성기는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 10여 개의 공장을 운영할 만큼 크게 성장한 폰 포슁거는 독일제국으로부터 기업의 지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제9대 CEO인 게오르크 베네닉트 2세와 그의 자식들이 독일 황제에게 제국의회 의원 칭호를 받은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게오르크는 독일 상원에 진출해 폰 포슁거의 본거지인 프라우나우 지역에 간선 철도망이 건설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세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20세기를 거쳐 지금까지도 폰 포슁거의 이름은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사의 모든 제품에 새기는 이니셜 ‘P’는 포슁거 가문의 자부심이자 ‘명품 유리제품’을 증명하는 보증서이기도 하다.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폰 포슁거에도 위기는 있었다. 가장 큰 위기는 1863년 제8대 CEO였던 요한 미하엘 2세가 마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폰 포슁거의 제품과 명성에는 그닥 타격이 없었지만 내부 문제로 회사 자체가 흔들렸다. 미처 공식적인 후계자를 선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연 CEO가 유명을 달리 했기 때문에 자식들의 재산·상속 분쟁에 휩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분쟁이 일어나 집안이 흔들렸다면 폰 포슁거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추락할 수 있었다.
19세기 최고 전성기 구가
자식들의 재산·상속 분쟁을 막은 것은 가문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CEO를 잃은 포슁거 가문은 신속하게 가족신탁기금을 마련해 자식들이 재산을 분할할 수 없도록 했다. 엄격하고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막내인 게오르크 베네딕트 2세가 차기 CEO로 결정돼 지주회사의 지배권을 갖게 됐다. 나머지 형제들은 남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미 브라이언트 대학 가족기업연구소의 윌리엄 오하라 소장은 자신의 저서 <세계 장수기업, 세기를 뛰어넘은 성공>에서 폰 포슁거의 이 같은 위기 극복 과정을 꽤 중요한 대목으로 다루었다. 오하라 소장은 “중요한 것은 상속이 승패를 가르는 전쟁이 되지 않게 하여 상속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자존심도 살리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라는 데니스 재프의 말을 먼저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영권을 상속받지 못한 자손들을 위해 폰 포슁거는 별도의 유리공장을 매입해서 그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이 때문에 19세기 말 한때는 바이에른 지방의 14개 유리공장 중 폰 포슁거가 10개 공장을 소유하기도 했다.”
김상범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요한 미하엘 2세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보여준 포슁거 가문의 행동을 가족기업의 ‘모범사례’로 꼽으며 이렇게 지적했다. “가족기업 내에 단 한 명의 상속자가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업 상속의 여부가 상속 대상자 사이의 승패로 간주되면서, ‘패배자’는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기도 한다. 부지불식간에 ‘결투의 문화’가 형성되고 주위의 친인척, 친구들이 경쟁 분위기를 조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에 따르면 포슁거 가문은 후계자로 선택받지 못한 자손들을 위해서도 구체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이 폰 포슁거가 400년 이상 가족기업으로 이어올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다.
폰 포슁거가 또 하나 유명한 점은 상업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440년 이상 유지, 번창해왔다는 것이다.
폰 포슁거가 위치해 있는 프라우나우 지역은 제일 가까운 상업지인 뮌헨에서도 200㎞나 떨어져 있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해 있지만 폰 포슁거가 처음 출발했을 당시는 물론 게오르크 베네딕트 2세가 철도를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프라우나우는 오지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겨울 추위는 말도 못할 정도로 혹독한 곳이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인 단점은 오히려 폰 포슁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리적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을 단행했던 것이다. 또 가문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윌리엄 오하라 소장은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은 집안의 힘과 독립심을 키웠고, 알프스를 넘었던 초기 이주민들과 같이 결단력과 용기를 가지고 거침없이 어려운 결정을 해나가게 했다”고 분석했다.
도제식 교육과 최고 장인 육성
최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최고 장인이 필요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포슁거 가문은 일찍부터 도제식 교육을 통한 장인 육성에 힘을 쏟았다. 현재 CEO(12대)인 슈테판은 이 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최고의 품질과 고객 서비스를 통해 성장을 추구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 직원들에게 제조 공정은 물론 각 공정 단계에서 필요한 도구까지 직접 손으로 제작할 것을 업무지침으로 내려보냈다. 폰 포슁거는 도제식 교육을 강화하고 장인 육성에 전사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최고 장인이 직접 만든 최고 수제품으로 폰 포슁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오하라 소장은 폰 포슁거의 성공 경영의 비결로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부자관계는 가깝고 친밀하게 한다. 즉 현재 CEO와 다음 세대를 이어가야 할 후계자의 관계가 친밀해야 가문의 경영을 이해하기 쉽고 기업을 이어가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차세대 명장을 확보하기 위한 훈련을 철저히 한다. 이것은 폰 포슁거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힌다. 최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최고 장인을 육성하는 일은 필수다.
셋째, 차세대가 가문 밖에서 기회를 갖는 것을 허용한다. 즉 밖에서 경험을 얻고 자격을 갖추어 돌아오는 것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 식 교육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과 견문을 중시하는 것다.
넷째, 배우자는 사업의 어려움과 시련을 이해하는 사업가 집안에서 택한다.
이 네 가지가 폰 포슁거를 400년 이상 이어오게 한 비결이라는 것이다.
폰 포슁거의 후계 원칙은 다른 전통 가족기업보다 유연해 보인다. 철저한 장자 후계도 아니며 가업을 뒤로 한 채 다른 세상의 조직과 경영을 배우는 데도 관대하다. 이 같은 모습은 대(代)가 거듭될수록 더하다.
최근에는 한 기업의 후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업을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를 증명하듯 가족기업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낮다.
폰 포슁거도 이 같은 현상과 같이 갈 것인가. 오하라 소장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독일의 유리 제조는 장인의 좋은 솜씨와 자부심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폰 포슁거는 갈수록 지탱하기 어려워지는 가족기업들이 공부해야 할 모범사례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김상범 수석연구원은 “폰 포슁거의 성공모델을 거울삼아 우리나라의 중소 가족기업들도 새로운 각오의 계기를 마련”할 것을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