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금융 테크 기업 현대카드는 ‘상시 재택근무’를 도입하고, ‘거점 오피스’를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금융권 기업 가운데서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올해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내세운 ‘금융 테크로의 질적 이동’이라는 목표에 맞춰 일하는 방식과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현대카드가 재택근무에 대한 남다른 비전이나 자신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몇 백년간 지속되어 온 출근제도의 변화가 연쇄적으로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서 지금도 앞으로도 실험적인 태도로 운영할 생각. 다만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컨설팅사와 함께 근무형태를 연구할 기회가 있었고 앞으로는 인재 관리를 위해서 안 할 수가 없다는 판단 하에 선실시 후발전 하기로 하였다.”며 상시 재택근무 제도 도입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상시 재택근무는 현대카드가 고안해 낸 현대카드만의 재택근무 제도다. 부서별 업무 특성 및 상황 별로 재택근무율을 정해두고, 직원이 원하는 날짜에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해 현대카드는 전사의 모든 부서와 업무의 특성을 분석해 대면 업무가 많거나 협업의 필요성이 높은 순서로 온사이트(On-site), 하이브리드(Hybrid), 리모트(Remote) 등 세 개의 그룹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각 그룹별로 각각 월 근무일수 20일의 최대 20%, 30%, 40%까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현대카드의 재택근무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에서 근무할 지를 정하는 일련의 과정을 직원 개인의 자율에 맡긴다는 점이다. 이전 주 수요일까지 다음 주 재택근무 스케줄을 정하고 신청하면 부서장의 승인 없이 그 즉시 결재 처리 된다. 때문에 부서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원하는 때에 재택근무를 사용할 수 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재택근무 제도의 핵심은 업무의 방식을 보다 유연하게 해 직원들이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때문에 자율적으로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율성은 비단 재택근무일을 선택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만 보장된 것은 아니다.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에 대한 계획과 팔로업도 스스로 하도록 했다. 직원들은 재택근무 당일 오전 부서장 및 부서원들에게 이메일로 본인의 업무 리스트를 간략히 공유하고, 퇴근 전에는 업무의 진행 상황 및 결과를 다시 공유한다. 이는 직원과 부서장 모두 재택근무에 뒤따르는 결과에 대한 투명한 공유를 통해 개인 및 부서의 업무가 수월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직원의 자율을 보장하는 한편 그에 대한 책임도 분명하게 해 회사 전체의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현대카드의 상시 재택근무의 도입은 업계에서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지난 2017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코어타임(core time) 이외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플렉스 타임(Flex Time)’을 도입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이보다 3년 빠른 지난 2014년에는 점심 식사 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도록 하는 ‘플렉스 런치(Flex Lunch)’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모든 제도의 기저에는 근무의 시간과 방식을 유연하게 해 직무의 종류와 직원 개개인의 스케줄에 맞게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근본적인 생각이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재택근무는 더욱더 유연한 일하는 문화를 조성하고자 하는 정태영 부회장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는 제도였다.
사실 현대카드가 상시 재택근무를 기획한 것은 지난해 4월의 일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방역의 목적으로 운영했던 ‘비상 재택근무’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적게는 직원의 30%에서 많게는 70%까지 재택 근무를 하도록 했던 팬데믹 기간이 재택 근무라는 낯선 근무 형태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셈이었다. 이후 현대카드는 재택근무 도입에 대한 임직원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서베이를 실시하고 재택근무 형태 및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각 부서의 업무와 직무별 특성을 분석해 제도를 마련한 다음 약 200여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파일럿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된 것이다.
상시 재택근무와 함께 도입하는 ‘현대카드 강남 거점 오피스’ 역시 다양한 근무 방식을 활용해 유연한 기업 문화를 조성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오피스 온리(office only)’였던 과거의 근무 환경이, 집과 거점 오피스까지 확대됨에 따라 직원들의 선택지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거점 오피스는 대한민국 금융의 중심인 여의도에 위치한 현대카드 본사의 특성상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분당, 판교, 용인 등 경기권 및 강동, 송파, 강남 등 서울 동남권 지역에 거주하는 임직원들의 출퇴근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이와 함께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이거나 외부 미팅 등으로 인해 사무실로 들어오기 힘든 직원들에게 거점 오피스는 유용한 공간이다. 현대카드는 오는 6월 서울 2호선 강남역 인근에 첫번째 거점 오피스 문을 열고, 이후 서울 근교 지역에 추가로 거점 오피스를 늘려나갈 계획이다.
규율과 통제를 강조하는 조직 문화로는 기술이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고 혁신의 원동력인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글로벌 IT 기업들을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망한 테크 기업들은 느슨하면서도 유연한 환경 속에서 직원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규칙을 없애 나가는 추세다.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는 통제의 문화에선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고, 기존의 기술은 도태되는 사이클이 속도감 있게 돌아가는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유연하지 않은 기업들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역시 IBM과 코닥 등의 사례를 들어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변신하려 노력하는 기업이야말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위대한 회사라고 말한 바 있다. 타자기 회사였던 IBM이 PC, 메인프레임, 컨설팅, 그리고 인공지능(AI)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신을 해 온 반면, 코닥은 사진이 필름 기반에서 디지털로 전화하는 기술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금융업에서 탈피해 테크 기업으로 변화하고자 하는 현대카드에게 자율에 기반한 유연한 일하는 방식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디지털 현대카드를 선언한 2015년을 전후해 이른바 ‘플랙서블(Flexibile)’이라는 수식어를 단 다양한 기업 문화 제도를 도입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현대카드는 언제 어디서든 일의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업무 환경 조성을 위한 투자도 늘려간다. 오는 7월 전 임직원에 50만원 상당의 디지털 코인(Digital Coin)을 지급해 재택근무 시 사용할 수 있는 무선키보드나 마우스, 모니터 등 디지털 기기들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해 온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라며 “직원들이 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더 혁신적이고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발굴해 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