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내정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에 통신사를 초청했다. 조선도 평온을 되찾고 막부 이전에 있었던 임진왜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에 응했다. 당시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조선은 문화를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 3년(1625년) 통신사 부사 강홍중이 일본을 겪고 난 뒤 심경은 복잡해졌다. 도일 전에는 ‘원수의 나라’, 도이(島夷, 섬 오랑캐)라는 적대감에 충만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일본은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성함이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되었다’고 <동사록>에 적고 있다. 16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선진문물을 배우는 란가쿠(蘭學) 열풍이 불었던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유학생을 대거 유럽에 보내 선진문물을 배우도록 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진출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는 제국주의 팽창이라는 삐뚤어진 길로 빠졌지만 정치 법률 조직 재정 스포츠 의학 등 각 분야의 수준은 덩달아 업그레이드됐다.
일본은 이미 이때부터 기초과학 투자를 해온 것으로 과학계는 보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기초과학에 관한 한 역사와 깊이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고백한다. 해마다 10월이면 온 국민이 혹시나 하며 기대하는 노벨상에서 일본은 올해 과학상 수상자 3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수를 빗대 19대 0이라는 말도 나온다. 당분간 스코어 차이는 더 벌어질 게 확실하다. 매년 노벨상 발표 때마다 되풀이될 좌절감과 중압감에서 국민들과 과학자들이 벗어날 길은 없을까. 그 차이를 알면 조금은 누그러질지도 모르겠다.
노벨상위원회는 중요한 연구 거점에 자주 노벨상 후보 추천을 요청한다. 주변에 수상자가 있으면 그만큼 유리하다. 일본은 이미 글로벌 연구네트워크가 갖춰진 데다 과학상 수상자가 도쿄와 교토 중심에서 올해에만 2명을 배출한 나고야대로 확산되고 있다. 주요 연구거점은 삿포로 센다이 오사카 히로시마 등 지방에까지 뻗어 있다.
역사적으로도 일본인 과학자는 노벨상 시상 첫 해인 1901년부터 생리의학상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함께 연구한 독일 과학자가 그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니 아주 초창기부터 일본인이 유력 후보 반열에 오른 셈이다.
1949년 일본인 과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첫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지만 그 전에도 꾸준히 후보 추천이 이뤄졌다. 노벨위원회가 공개한 1901~1963년 사이 공식 후보만 일본인은 163명에 달했다. 한국은 한 명도 없다. 일본 정부는 2050년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30명 배출한다는 목표로 기초과학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한국 과학계도 고개를 끄덕이는 목표다. 일본의 한 해 연구개발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2%인 2000억달러로 한국의 4배에 이를 정도로 절대 비교 자체가 무리다.
일본이 1917년 ‘이화학연구소’를 설립해 물리학과 화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 누적 성과에다 추가 투입되는 연구개발비에도 격차가 있으니 결과는 자명하다. 한국은 1965년 베트남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미국 정부 지원을 받아 KIST를 출범시킨 뒤 미국과학재단을 본뜬 한국연구재단(옛 한국과학재단)을 만들어 기초과학 투자 시발점으로 삼은 게 1977년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점검하고 개선 방안을 찾아내는 일이다. 먼저 연구 기반이 돼 있는지 자문해보자. 연구는 정답이 주어져 있지 않은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연구다. 답이 맞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이미 정해진 정답을 빨리 구하는 ‘공부’와 ‘연구’는 방식부터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짧은 기간에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 방식이 그렇고, 교육 방식도 그렇다. 대학은 순위 평가의 올가미에 씌워 논문 한 편에 담아야 할 연구를 몇 개로 나눠 저널에 등재하는 게 새로운 학문 풍토로 자리 잡았다. 그래야 대학 평가가 좋아진단다.
인재 배분도 적절히 이뤄져야 하지만 이공계 기피현상은 개선될 조짐이 안 보인다. IMF 외환위기 당시 트라우마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당장 수익을 내고 싶어 하던 기업들이 연구소 임직원들을 우선적으로 구조조정하면서 해고 위험이 없는 의사를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는 게 중론이다. 그 결과가 전국의 의대를 한 바퀴 돈 뒤 서울 공대 시작이라는 서열 매김이다. 그나마 미국에 유학 간 이공계 박사 중 절반가량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물고 싶다는게 현실이다.
우수 두뇌가 과학자를 꿈꾸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정답인 듯하다. 단순한 일이 쉽지 않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