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에게 아이스크림은 늘 낯설고 어딘가 특별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가깝게 두고 즐기는 음식이면서도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1800년대 중반 미국에서 아이스크림이 대중화되기까지 200년 동안 아이스크림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어 있었다는 것도 어쩌면 내가 느끼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떨떠름한 거리감과 무관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이 처음 만들어진 나라가 서양이 아닌 중국이라는 데는 놀랄 수밖에 없다. 눈에 향료를 섞어 만든 중국의 아이스크림을 원나라에 왔던 마르코 폴로가 먹어봤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것이 유럽으로 건너가 현재의 아이스크림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이 눈에 우유와 꿀을 섞어서 먹던 것이 아이스크림의 기원이라는 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스크림의 기원이 어찌되었든, 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늘 눈여겨 바라보며 혼자 웃곤 한다. 접시나 용기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경우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은 정확하게 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나서 그 패인 자리를 판판하고 고르게 다듬어 가면서 먹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움푹 파인 자리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냥 편하게 퍼먹는 사람들이다.(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께서도 3초 정도만 ‘나는 어떻게 먹더라?’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왜 아이스크림을 먹는 한국인은 이처럼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일까. 누군가는 그냥 편하게 퍼먹는데 왜 누군가는 떠먹은 자리를 고르게 잘 메워가면서 먹는 것일까. 한국인만이 아니다. 일본이나 중국 사람도 이와 비슷하게 둘로 나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집안에서도 이 모습은 정확하게 둘로 갈린다. 한 가족이면서도 누군가는 푹푹 퍼먹는데 누군가는 한번 떠먹고 그 자리를 가지런하게 메워가면서 먹는다.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집에서 이 실험 아닌 실험을 해 봐도 좋다. 젊은 사람일수록 푹푹 퍼먹는 쪽이고 나이든 사람일수록 퍼 먹은 자리를 고르게 메워가면서 퍼 먹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수하고 지엽적인 것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킨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모습에서 농경사회 의식과 산업사회 의식으로 갈라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본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산업사회 구조에 길든 의식으로는 아이스크림을 그냥 떠먹을 뿐이다. 그 자리를 고르게 메우지 않는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살아가지만 그 의식은 여전히 물동이를 이고 우물물을 길러 나르고, 새벽이면 홰를 치며 우는 닭소리에 잠을 깨고, 내일 비가 내릴까 바람이 불까를 하늘을 보면서 걱정하던 농경민의 의식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 농경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아이스크림을 앞에 놓고 한번 떠먹고는 그 자리를 맨질맨질 메우고 또 한 번 떠먹고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농경사회의 의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형태를 중요시한다. 물건의 형태가 찌그러지거나 색깔이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물건이 온전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색깔이나 형태가 변할 때만 그 물건의 수명이 다한 것으로 알고, 못 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길든 세대들은 형태가 아니라 기능과 디자인으로 그 물건의 성능과 존폐여부를 결정한다. 가전제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은 아무리 써도 그 형태가 별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능은 쓰면 쓸수록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농경민 의식으로 살아가는 부모는 ‘멀쩡한 물건을 두고 또 산다’면서 새 것만 좋아하는 자식들을 이해할 수 없고 산업사회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아들딸은 ‘디자인도 후지고 성능도 개떡 같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가 어이없고 한심해 보이는 것이다. 색깔이 변해야 상한 것이고 형태가 찌그러져야 망가진 것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도 아이스크림을 곱게 떠먹고 그 자리를 다듬는데, 형태가 아니라 기능과 디자인이 물건의 생명이라고 아는 사람들은 움푹움푹 아이스크림을 파먹어 들어가는 것이다. 먹으면 되는 것이지 아이스크림의 표면이 왜 곱게 가지런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형태는 멀쩡한데 기능과 디자인이 낡고 후졌다면… 산업사회의 의식을 가진 세대에게는 당연히 폐품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농경사회의 의식을 가진, 아이스크림을 잘 다독여가면서 먹는 바로 나 같은 부류는 그걸 버리질 못한다. 멀쩡한 걸 버린다는 의식이 손바닥의 가시처럼 찔리면서 죄짓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어쩌랴. 농경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편하게 마구 파먹는 산업사회의 아이들, 그 오늘의 젊은이들이 고통이나 난관에 속수무책으로 허약한 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물건을 고쳐서 쓰던 세대가 아니라 작동이 잘 안되면 무엇이든 새로 사면서 자란 세대라는 점을 잊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 학과사무실에 컴퓨터를 새로 들여놓으면서 과장이라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새 컴퓨터니까 아껴서 써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낸 일이 있었다. 도대체 컴퓨터를 어떻게 아껴서 쓰라는 것인지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직업 안에서는 그래도 변화하는 사회를 앞서 받아들인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었다. 글을 쓰는 작업에 워드프로세서를 도입한 것이 1986년, 서울올림픽보다 2년 전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리던 해였다. 원고지를 버리고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는 문인 가운데서 몇 손가락 안에 들게 빠른 변신이었다.
인터넷이나 이메일에 관해서는 좀 더 빨라서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먼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인터넷의 석기시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정부의 의뢰를 받아 한글 이메일을 당시의 데이콤에서 개발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을 시험적으로 사용하며 개선점을 찾아내기 위해 사회 각 분야에서 차출된(?) ‘정보화 사회를 생각하는 사랑방 모임’의 멤버로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환경이란 지금과 비교하자면 말 그대로 석기시대였다. 해외의 데이터베이스에 국제전화를 걸어 정보를 검색하는 수준이었으니 정보검색에 드는 국제전화요금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날아들면서 확인이 안되는 혼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와서 “김일성이가 죽었다는데 확인이 안 돼, 네 그 해외 데이터베이스로 검색을 좀 해 줘”하고 다급한 부탁이 날아들기도 했었다.
그런 나였지만, 농경민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채 산업사회를 살고 있다는 걸 숨기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오늘도 음악을 사러 CD점을 찾는다. 원음을 다운받아서는 뭔가 허전하다. 내가 그 음악을 가졌다는 소유감 혹은 충일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 CD를 사서 고놈을 만지작거리며 들여다봐야 비로소 내가 가졌다는 느낌이 온다.
농경민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여, 내일도 모레도 나는 아이스크림을 곱게 다듬으면서 파먹고 앉아 있을 테고, 음원을 다운받기보다는 CD를 사러 어딘가를 기웃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