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진화론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진보를 의미하는가?’를 주제로 서울대 생명과학부 홍성욱 교수가 설명했다. 홍 교수는 자연과 인간 사회를 축으로 진화와 진보를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주었다.
최근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조새 화석 사진을 빼는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몇 년 전 리처드 도킨스 옥스포드대 교수가 펴낸 책 <만들어진 신>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서양인들은 아직까지 창조론을 더 믿는 편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진화론을 발표할 당시 종교계의 거센 반론을 받지 않을까 우려했다. <종의 기원(1859년)>은 우여곡절 끝에 출판됐다. 6판(1872년)에서야 ‘진화(EVOLUTION)’라는 단어가 반영됐다. 다윈과 동시대를 산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스펜서가 생명체와 사회를 포괄하는 원리로서 ‘진화’라는 개념을 널리 전파한 후였다.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이어 근대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어떤 이론이든지 절대적이지는 않다. 현재의 ‘상식’이 미래의 새로운 이론으로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지동설 이전의 천동설이 상식이었듯 말이다. 인체의 비밀은 물론 신비로운 자연 현상들은 창조론이 자리 잡을 공간이다. 인간의 겸허함과 나약함 속에 다양한 이론이 깃들 수 있는 셈이다.
난공불락일 것 같았던 유럽이 무너지는 모양새다. 유럽의 위기는 경제 문제에서 촉발됐지만 사회문화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계 질서의 재편, 지각변동이 가속화될 조짐이다. 한때 동양에 대해 강한 우월감을 가졌던 서양의 본류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엉뚱하게도 진화론을 되새겨 보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살아남은 생물이 꼭 ‘우월한’ 종은 아니다. 어느 시기에 환경이 급변할 때 ‘우연하게’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종이 생존했다고 봤다. 빙하기가 닥쳤을 때 공룡은 압도적인 강자였지만 멸종을 면치 못했다. 다윈이 자연선택을 더 발전된 상태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면서 많은 오류를 낳았다. 사회진화론자들은 20세기 초 부랑자, 정신박약자 등에 대해 거세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진화론을 이론적 바탕으로 삼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최악의 사례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서구 사회는 식민지 경영과 무역, 때로는 약탈적 경제행위로 부를 축적하고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이 과정에서 발전한 자본주의는 기업의 생존법칙이 시장원리 속에 ‘적자생존’과 ‘약자 도태’라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요즘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 등이 주요 화두로 자리잡았다. 진화론의 ‘과도한 확장 해석’에 근거를 둔 것처럼 보이는 미국식 MBA교육에 바탕을 둔 경영방식에 대한 비판과 반론이 많아지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이러한 흐름이 한때 지나가는 기업경영의 유행이나 하나의 트렌드에 그칠지 아니면 근원적 변화를 요구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여론과 사회 전반에 태풍이 몰아친다면 기업 역시 부담스럽지만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생존할 수 있고 생존에 성공한다면 결과적으로 우월해질 수 있어서다.
또 한 가지, 개인에게 진화론을 빗대어 이런 저런 ‘망상’을 해본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을 많이 맞닥뜨리게 된다. 이 때 대체로 자신의 무능과 부족함을 자책하는 편이다. 경쟁이 극심한 한국사회는 청소년이나 젊은층, 장년층은 물론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자신감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함몰돼 가고 있다.
열등해서가 아니라 다만 ‘운이 없어 그렇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자포자기일까 운명론일까.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이런 해석은 자기 위안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공무원들에게는 관운, 시운이라는 게 있다. 정권이 바뀌어서 양지가 음지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일은 허다하다. 실력이 없어서 도태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맞닥뜨린 정치적 변동기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갑자기 찾아온 환경에 맞지 않는 종이나 그 편에 속했던 탓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수만 세대에 걸쳐 진행되는 진화 과정에서 본다면 2012년 한국 사회와 세계 질서의 재편은 찰나의 순간, 나비의 조그만 날갯짓 수준도 못된다. 뭐든지 편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