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미술가나 조각가의 기억력이 필요해요. 당신이 항상 내 눈에 보이고 당신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성실하게 내 곁에 있게 하기 위해서죠.”
사랑하는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낸 한 여성 과학자가 쓴 일기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게 너무나 슬펐다. 남편의 얼굴과 남편의 느낌을 힘들게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라는 자연현상이 야속했으리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배운 사람들이야 기억할 수 있고,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수사(修辭)를 찾았겠지만 그녀가 꿈꾼 것은 ‘조각가의 기억력’이었다.
이 애절한 일기의 주인공은 바로 마리 퀴리다. 사상 처음으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인물이자 우리가 흔히 ‘퀴리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퀴리부인으로 알려진 건 그녀의 남편이 퀴리였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은 그녀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던 피에르 퀴리다. 피에르 퀴리는 평생을 과학에 바친 단순하고 순수한 과학자였다.
<내 사랑 피에르 퀴리>(궁리 펴냄)는 마리 퀴리가 남편이 죽은 지 17년 만인 1923년에 쓴 회고록이다. 책에 수록 된 마리 퀴리의 사부곡(思夫曲)은 감동적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고 내 삶에서 당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결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당신이 나에게 바라는 방식 그대로 살도록 힘쓰겠다고.”
사랑의 위대함은 추억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현존하지 않아도 그를 기억하고 그를 지키는 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마리 퀴리는 이를 지켰고 실천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이 끝맺지 못한 새로운 연구에 매달려 라듐이라는 원소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 업적으로 그녀는 생애 두 번째로 191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남편의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연구에 매달려 있던 시절 그녀는 이런 일기를 남긴다.
“실험실에 하루 종일 있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 실험실만큼은 마치 당신의 삶과 당신이 이 세상에 왔다갔다는 자취를 기억하고 있는 환상의 장소로 여겨집니다.”
실험실로 남은 남편. 바닷가도 아니고, 멋진 승용차도 아니고 약품냄새 나는 실험실로 남은 남편이 더 로맨틱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마리 퀴리는 자신의 지명도에 가려 죽은 남편의 업적이 가리어지는 걸 누구보다 가슴 아파 했다. 39살에 혼자된 그녀는 위대한 과학자였던 남편의 생애를 복원하는 데 모든 걸 바쳤다. 그것이 사랑했던 사람을 조각처럼 기억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의 사랑
시월이라 층층이 언 얼음 위에 찬 기운 서린 댓잎 자리 깔았네 차라리 그 대와 얼어 죽을지언정 새벽닭 울지 못하게 하리라.
조선 전기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김수온(1410~1481)의 시다. 음력 시월이면 지금의 11월쯤 되니 추울 때다. 그 추운 날 연인과 댓잎 자리를 깔고 누었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그래도 날이 밝는 것보다는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이 시는 유교가 사회적 가치관의 중심에 있었던 시절 명망 있는 학자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에로틱하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 중심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 있다.
이민홍이 펴낸 <낭만연인>에는 우리 선조들의 주옥같은 사랑시 108편이 수록되어 있다. 전라도 부안에 살았던 조선 선조 때의 명기 이매창의 시를 보자.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가락지 좀 보시구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시다. 현대에 쓰인 시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묘사가 뛰어나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그리웠는지 표현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귀밑머리와 가락지다. 맘고생이 심해 하룻밤 새 머리가 희었고, 몸이 여위어 손가락이 가늘어졌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귀여운가. 조선시대의 사랑은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무 때나 연락할 수 있는 휴대전화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을 문 앞에서 며칠이고 기다리는 심정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책의 편자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시대 3년간 나눌 사랑을 3일 만에 탕진할 수 있는 지금,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