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사회는 저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말이다. 서울과 파리가 다르고, 서울 안에서도 인사동과 청담동이 다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왜 그리고 무엇이 한 공간의 특성을 구성하고 다른 공간과 차이를 만들까?’ 이 질문에 대한 르페브르의 고찰은 계급적이고 투쟁적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생산 수단의 소유관계로 생산양식을 정의’했던 마르크스의 한계를 지적하며, 생산양식의 변혁은 새로운 공간 관계의 생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삶을 공간을 향한 투쟁으로 이해한 것이다. 전후 보수화되는 프랑스의 가치에 저항해 시작된 68혁명의 주인공들이 외친 슬로건, ‘도시에 대한 권리(Le droit a la ville)’가 그해 르페브르가 저술한 책의 제목인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도시를 바꿔라, 인생을 바꿔라(Changer la ville, changer la vie)’ 도시 거주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작품인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단순하지만 명징한 주장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을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개념. 즉, 공간적 실천(Pratique spatiale), 공간 재현(Representations de l’espace), 재현 공간(Espaces de representation)을 제시한다. 누군가 공간을 인지하고 설계하고 구획짓고 배열하는 과정, 신도시 계획이 대표적인 ‘공간 재현’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활동을 통해 재현된 공간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며 사회적 관계망이 연결되는 단계가 바로 ‘공간적 실천’이다. 그리고, 이 체험된 공간에 상징적으로 이러저러한 의미가 부여되며 자신만의 비밀의 장소와 같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 이상으로 다가올 때 ‘재현 공간’으로 자리잡으며, 공간은 의미를 갖는다. 오늘은 파리라는 공간이 예술적으로 ‘재현 공간’으로 자리잡은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난해하기로 소문난 르페브르의 철학으로 시작해 본다. 그랑 팔레(Grand Palais). 1900년 만국박람회의 개막에 맞춰 건립된 7만7000㎡ 규모의 전시장이다. 1887년 건축된 에펠탑보다도 많은 철골이 사용된 아르누보 양식의 이 궁전은 철골에 강화유리를 붙여 시공되는 현대 마천루의 상징적인 출발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정식 명칭인 ‘순수예술 대궁전(Le Grand Palais des Beaux-Arts)’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을 예술에 두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공간 재현이 특징이다.
그랑 팔레는 120여 년의 시간 동안 프랑스 미술, 예술, 과학의 전시 공간으로 공간적 실천을 통한 상징과 의미를 부여받으며, 명실상부한 파리의 랜드마크로 성장한다. 대표적인 전시 행사로 1974년 설립되어, 한때 아트바젤, 프리즈와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로 명성을 얻은 피악(FIAC, La Foire Internationale d’art Contemporain, 세계현대미술축제)이 있다. 피악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해 미술시장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다. 17세기 들어 미술품 거래는 주문 생산 방식에서 제작, 판매하는 유통 형식으로 발전하는데, 초기 이를 선도한 국가는 네덜란드다. 동인도회사의 수익을 배분받은 부르주아 시민들이 미술품을 구입하면서, 증권거래소를 통해 상업적 자본에 의한 미술품 거래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를 19세기에 이어받은 국가가 프랑스다. 프랑스는 대규모 살롱전을 통해 작가를 발굴하고 화랑을 통해 거래를 활성화했으며, 1904년 앙드레 르벨은 최초의 아트펀드를 만들어 당시 신인이었던 마티스와 피카소의 작품을 지속 구매하면서, 미술시장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벨 에포크 시대, 세계의 중심은 프랑스였다. 하지만, 경매와 아트페어에 있어서 프랑스는 선두에 서지 못했다. 1744년 런던에서 설립되어 서적을 경매하던 소더비(Sotheby’s)는 1913년 프랑스 화가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경매를 통해 판매하며, 미술품 거래의 새 장을 연다. 물론, 프랑스에도 드루오(Drouot)라는 큰 경매회사가 있지만, 현재 세계 미술시장 경매는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 미술품 거래 방식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만다. 바로 세계적 화랑들이 연합해 공동거래시장을 상업적으로 완성한 아트 바젤의 탄생이 그것이다. 아트 바젤은 연간 단위 미술품 거래 1조원 시대를 열며, 미술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1960년대 세계 미술시장의 60%를 차지했던 프랑스가 지금 전체적으로 3%, 현대 미술의 경우 1.9%로 내려앉은 통계만 보더라도 아트 바젤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자극받아 1974년 창설된 아트페어가 바로 프랑스 피악이다. 하지만 피악은 YBA(Young British Artist)를 앞세운 신진 작가 중심의 영국 프리즈 아트페어에도 밀리며 위기에 빠지고 만다. 이에, 피악이 내세운 도전이 바로 그랑 팔레였다. 2006년부터 피악은 그랑 팔레에서의 전시를 상설화한다.
그랑 팔레가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지는 역사 속 공간적 실천을 세계인에게 상징적으로 각인시켜, 르페브르식 표현을 빌리자면, 재현 공간의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의 불운 속에, 그랑 팔레가 포함된 프랑스박물관연합(RMN-GP)은 2022년 1월 미술계의 지진이라고 평가받는 놀라운 결정을 하고 만다. 바로, 피악이 주최한 그랑 팔레에서의 전시 운영권을 아트 바젤에 넘긴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트 바젤 파리는 올해로 세 번째지만, 올해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바로 리모델링을 마친 전시 공간의 상징 그랑 팔레에서 열리는 첫 번째 행사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지닌 상징성을 활용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을 파리로 되돌리겠다는 프랑스인의 절박함과 대범함이 함께 구현된 결정이라고 본다. 비록 외국계 자본에 운영권을 넘기더라도, 그 네트워크를 통해 찾아온 세계인들이 그랑 팔레라는, 그리고 파리라는 공간을 경험하고 새로운 상징을 부여하며, 옛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이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