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4일,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목격하고자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소더비의 ‘로얄 앤 노블’ 경매 프리뷰였다. 11월 11일 제네바에서 공개될 18세기 다이아몬드 목걸이,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악명 높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연관된 이 역사적 주얼리가 반세기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식이 내 발걸음을 이끌었다. 약 300캐럿의 다이아몬드로 빚어진 이 희귀한 18세기 주얼리는 세계 각국의 컬렉터와 역사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 역시 주얼리 전문가로서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목도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렇다. 이 목걸이의 진정한 매력은 역사적 무게에 있다. 18세기 후반 파리, 보석상 뵈머&바상주의 공방에서 시작된 한 주문이 프랑스의 운명을 뒤흔들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루이 15세가 애첩 뒤 바리 부인을 위해 의뢰한 화려한 목걸이는 국왕의 급서로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대금 미수로 파산 위기에 몰린 보석상들의 곤경은 야심가 잔 드 라 모트 백작 부인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녀는 교묘히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이름을 악용해 647개의 다이아몬드, 총 2840캐럿(현재 가치 약 173억원)에 달하는 목걸이를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남편 라 모트 백작의 조력으로 런던에서 은밀히 처분된 이 보석들은 곧 왕실을 뒤흔드는 스캔들의 진원지가 되었다. 사건의 파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어 결국 그녀는 사치와 방종의 상징으로 낙인 찍혔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로 작용하며 왕정의 종말을 재촉했다. 극적 반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라 모트 부인은 종신형 선고 후 기묘하게 탈옥에 성공해 영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왕비를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회고록을 출간함으로써 앙투아네트의 명성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런데 2022년 발표된 한 학술 연구가 소더비에 출품된 목걸이의 기원에 관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연구진은 1785년 4월, 런던의 명망 있는 보석상 윌리엄 그레이가 라 모트 백작으로부터 다이아몬드 350개를 매입한 기록을 발굴해냈다. 이 발견은 소더비가 경매에 부친 목걸이의 다이아몬드들이 악명 높은 ‘마리 앙투아네트 스캔들 목걸이’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받고 있다.
소더비 역시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에 나온 목걸이에 사용된 다이아몬드들이 해당 목걸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더불어 제작 시기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 목걸이가 프랑스나 영국 궁정의 왕족 또는 최상위 귀족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홍콩 소더비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유리 케이스 안에서 시대를 초월한 위엄을 뽐내는 18세기의 걸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200여 년간 영국 앵글시 후작 가문의 품에 안겼다가 근래 48년간 아시아 컬렉터의 손길 아래 숨죽여온 이 목걸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완벽한 자태를 자랑했다. 소더비 주얼리 유럽 및 중동의 수장 안드레스가 경건한 손길로 목걸이를 들어 올리는데 그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묻어났다.
“2세기 반의 풍파를 견뎌낸 이 걸작은 그 어떤 왕실 주얼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당대 최고의 미학적 안목, 장인의 숨결, 그리고 혁신적 기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결정체입니다. 제작 당시의 찬란한 광채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보는 이의 영혼을 울리고 있죠.”
안드레스의 배려로 목걸이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착용해 볼 특별한 기회도 얻었다. 세 줄로 이어진 다이아몬드들은 은하수의 별들처럼 유려하게 흐르고 양 끝의 다이아몬드 태슬은 우아한 자태로 눈부신 빛을 발했다. 조심스레 손에 들어 올린 순간, 예상 밖의 가벼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글리제’ 스타일의 이 목걸이는 양 끝의 높낮이를 다르게 조절해 착용할 수 있고, 태슬을 자유롭게 늘어뜨리거나 우아한 매듭으로 연출할 수 있다. 안드레스의 제안으로 매듭을 지어보니 300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유연성을 지녔다.
목걸이의 다이아몬드들은 각각 1~1.5캐럿의 ‘올드 마인 컷’으로, 전설적인 인도의 골콘다 광산에서 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세기에 발견된 골콘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순수하고 새하얀 다이아몬드로 명성이 높다. 광산이 고갈된 지 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 명성은 여전히 빛을 발해 거래 시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다. 이 역사적 목걸이가 영국 앵글시 후작 가문에 귀속된 경위는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존재는 1937년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의 대관식에서 극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실 비튼의 렌즈에 포착된 마조리 페이젯 앵글시 후작 부인의 우아한 자태와 함께 이 목걸이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한편 1960년대에 접어들며 목걸이의 여정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유럽을 떠나 아시아 컬렉터의 소장품이 된 것이다. 이후 1976년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200주년 기념 전시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긴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소더비 경매장에 화려하게 귀환했다.
프랑스 왕정의 몰락과 영국 왕실의 영광을 모두 목격한 이 역사적인 주얼리가 이제 현대 예술 시장의 중심에 섰다. 소더비는 추정가를 180만 280만 달러로 책정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 가격이 목걸이의 진정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중요성을 고려하면 실제 낙찰가는 이를 크게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18세기 프랑스 왕실의 스캔들에서 시작해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20세기 영국 왕실의 영광을 장식하기까지, 이 목걸이는 유럽 근현대사의 축소판을 광채 속에 담고 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3세기를 관통한 이 다이아몬드의 서사가 21세기 글로벌 경매장에서 어떤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될지 우리는 곧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목격하게 될 것이다.
윤성원 주얼리 칼럼니스트·한양대 보석학과 겸임교수
주얼리의 역사, 보석학적 정보, 트렌드, 경매투자, 디자인, 마케팅 등 모든 분야를 다루는 주얼리 스페셜리스트이자 한양대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교수다. 저서로 <젬스톤 매혹의 컬러> <세계를 매혹한 돌> <세계를 움직인 돌> <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나만의 주얼리 쇼핑법> <잇 주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