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눈치 보는 동물이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의 몸짓과 행동을 살피고 읽으며 살아간다. 일찍이 공자는 눈치 없는 인간을 도적 같은 놈(賊)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편한 대로 앉아 있는 친구 정강이를 지팡이로 두드리면서 한 말이다. “너는 어려선 공손하지 못했고, 어른 되어서도 본받을 것이 없었으며, 늙어선 죽지조차 않고 있다. 너 같은 놈을 도적이라 한다.”
공자에 따르면, 인간의 최고 도리는 인함(仁)에 있다. 공자가 그 뜻을 정확히 하지 않았기에, 인(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학자마다 다소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대체로 인함이 처지와 상황에 맞추어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란 데에서는 일치한다. 공자는 인함에 이르는 길이 서(恕)에 있다고 했다. 서(恕)란 자신을 미루어 타인을 생각하는 힘이다. 달리 말해, 타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현대 진화심리학에선 이를 마음 이론이라고 부른다. 공감, 즉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지 미루어 짐작하는 능력이다. 공자는 그 원리를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일’로 압축했다. 눈치 없는 인간은 이를 좀처럼 해내지 못한다.
똑같은 유전자라도 환경에 따라 적합한 표현형을 얻기도 하고, 그대로 잠재해 있기도 하듯이, 마음 이론 역시 이기적으로 발현될 수도, 이타적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때때로 아예 발현되지 않는 인간도 있는데, 이를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미국의 작가 패멀라 S. 터너의 『인류 진화의 일곱 걸음(롤러코스터)』에 따르면, 인류만 마음 이론을 진화시킨 건 아니다. 침팬지나 큰까마귀도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다. 큰까마귀는 똑똑하기로 유명하다. 이 새는 나중에 먹기 위해 음식을 숨길 줄 안다. 그런데 먹이를 숨길 때 이 새는 독특하게 행동한다. 다른 까마귀가 자기 행동을 지켜보면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그 새가 자리를 뜨면, 음식 숨기는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다.
수컷 침팬지는 공격성으로 유명하다. 경쟁자를 잔인하게 제압하고, 먹이를 빼앗아 독차지하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공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때때로 수컷 침팬지는 어미를 잃고 낑낑대는 어린 침팬지를 입양한다. 아무 혈연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 안의 마음 이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공동체 모습은 완연히 달라진다.
인류가 연민의 힘을 갖췄다는 최초의 증거는 동유럽에서 발견한 약 18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다. 이가 다 빠져서 단 하나만 남은 늙은 남성 화석이다. 그는 스스로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누군가 죽 같은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처지였다. 그런데 치조골 상태로 보아 이 남성은 죽기 직전 몇 년 동안 살아 있었다. 노인을 불쌍히 여긴 어떤 존재가 미리 음식을 씹어 걸쭉하게 만든 후, 조금씩 흘려 넣었을 테다. 약자를 자연의 무정함에 내맡기지 않고 돌볼 줄 아는 친절함이 그때부터 인류 문명의 한쪽에 확연히 자리 잡았다.
문명이란 무엇일까. 일종의 방향 전환, 즉 마음 이론같이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이타적으로 사용할 때 나타나는 공동체 질서다. 공자는 타자를 배려하며 눈치를 사용하는 힘(仁)을 모두가 갖춰야 증오와 폭력이 지배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지위나 재산을 물려받았다 해서 저절로 존귀한 존재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못했다. 고생해 얻은 게 없는 사람은 현대 경제학에서 말하는 지대 착취자가 되기 쉽다. 자산을 이용해 쉽게 이득을 얻는 자들이 땀 흘려 성실히 일해서 부의 원천을 이룩하는 이들을 못살게 구는 세상을 도탄(塗炭)이라고 한다. 이 말은 중국 고대의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면서 쓴 격문에서 유래했다. 걸왕은 달콤한 술로 연못을 채운 후 나무마다 고기를 매달아 놓고 날마다 즐겼다. 서민들 삶은 진흙 수렁(塗)에 빠진 듯, 숯불 구덩이(炭)에 떨어진 듯 어렵고 힘든데, 군주가 그 고통의 열매를 빼돌려서 제 한 몸을 즐기는 데 쓰는 나라는 차라리 빨리 망하는 쪽이 더 나았다. 파괴 없는 혁신은 없으니까. 공자에 따르면, 타인을 이끄는 존재인 군자(君子)는 군주의 아들이란 뜻에서 머물러선 안 되고, 군주다움을 이룩한 존재여야 했다. 타인의 처지를 미루어 헤아리는 힘, 즉 눈치를 배우고 익혀 학문과 덕이 수준에 이른 사람일 때 비로소 필부에서 벗어나 오롯한 군자일 수 있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 역시 생각이 같았다. 그는 눈치 없는 인간을 도적이라고 불렀다. “인함을 해치면 도적 같다고 하고, 의로움을 망치면 잔인하다고 한다. 잔인하고 도적 같은 놈을 필부라고 부르니,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그의 유명한 혁명론이다. 눈치를 안 보고 행동해 인함과 의로움을 망치는 자는 필부일 뿐 임금일 수 없다. 군주다움을 갖추지 못한 지대 착취자를 끌어내려 파멸시키는 건 당연하다. 그래야 공동체는 분수를 지켜 행동하고 타인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復禮)로 돌아갈 수 있다.
패멀라 터너에 따르면, 우리 몸엔 눈치 보기에 최적화한 기관이 있다. 공막(눈알의 겉을 싼 흰자)이다. 눈은 거짓을 좀처럼 숨기지 못한다. 어두운 홍채와 눈동자, 그와 대비를 이루는 하얗고 밝은 흰자는 아주 미묘한 움직임으로도 우리 마음이 바라는 것에 사람들 눈길을 모아들인다. 흔히 타인이 거짓을 말한다고 느낄 때 요구한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언어가 진화하고 이야기가 발명되기 전에 인류는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않은 몇 가지 소리와 몸짓을 합쳐 의사를 주고받았다. 우리 사촌인 영장류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인 호미닌과 영장류 사이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눈빛 신호’다. 영장류 눈엔 공막이 없거나 옅어서 어디를 바라보는지 언뜻 알기 어렵다. 먹잇감을 몰래 독점하려 할 땐 이런 눈이 유리하다. 그런데 무리 사냥을 할 땐 이야기가 다르다.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소리 대신 눈짓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들키지 않고 무리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눈알을 굴려 의사를 전달하고, 표정을 통해서 마음을 전하는 데 인류보다 능숙한 생명체는 없다. 눈치를 살펴서 타자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힘은 우리 유전자에 굳게 내재해 있다. 인류가 눈치 없는 지도자를 혐오하고, 그 목을 치는 데 서슴없는 궁극적 이유다. 리더의 자질은 연민과 공감의 힘에 달린 까닭이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