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어에 관심이 없다는 골퍼의 얘기는 거짓말이다. 아무리 즐기더라도 스코어에 진심이지 않은 골퍼는 드물다.
“내 스코어는 고쳤는데 오기된 동반자 스코어를 내가 정정하는 기능은 없더라고. 분명 동타였는데 1타 뒤진 것으로 남아 찝찝해.”
언젠가 고교 친구가 캐디 실수로 잘못 적은 스마트 스코어를 앱에 들어가 직접 수정한 경험을 들려줬다. 귀가해서 정확한 스코어를 되찾으려는 집념이 대단했다. 앱 기능상 잘못된 본인 스코어는 고칠 수 있지만 동반자 스코어까지 건드리지는 못한다. 그날 17번 홀까지 친구가 동반자에게 1타 뒤졌는데 최종 합계로는 2타 뒤졌다는 사실을 귀가해서 복기하며 알았단다.
문제는 캐디가 마지막 홀 스코어를 적은 데서 비롯됐다. 친구는 파를 잡았는데 보기로, 보기를 범한 동반자 성적은 파로 오기했다.
캐디가 착각한 것이다. 원래라면 둘이 동타로 끝났다. 앱에서 동반자 스코어를 파에서 보기로 수정하지 못해 잘못된 스코어로 영원히 남게 됐다. 그렇다고 동반자나 캐디에게 연락해서 상대 스코어를 정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진 않았다.
“스코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는데, 온 동네에 소문을 내니까 일일이 해명도 못 하고 속만 상해요.”
언젠가 사촌동생이 고교 동창 골프모임에서 겪은 황당한 일을 토로했다. 미스 샷을 거듭한 친구를 자기 나름대로 배려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연이었다.
평소 2~3타 뒤지던 친구가 사건 당일 첫 홀에서 트리플 보기를 범하고 다른 동반자들은 보기와 파를 잡았다. 스코어를 제대로 적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가 일파만파(모두 파)라며 선방을 날려 묵인했다.
주거니 받거니 승부를 이어갔다. 마지막 홀에서는 파를 잡은 그 친구보다 더블 보기를 범한 사촌동생이 전체 스코어에서 1타 뒤졌다.
마지막 홀도 모두 파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에 캐디가 스코어를 그냥 제대로 적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건 이틀 뒤 다른 동창에게 전화를 받은 후였다. 그가 드디어 사촌동생을 이겼다고 자랑하더라는 내용이었다. 일파만파에 멀리건, 심지어 컨시드까지 후하게 줬는데 이겼다는 소문을 내다니 어이없고 괘씸했다. 구차해서 해명도 못 했다.
골프 스코어 때문에 속이 상하는 사례들이다. 상대가 룰을 위반하고도 이겼다고 으스대거나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다닐 때다. 자기만족이나 할 일이지 동네방네 떠들어 대니 기분이 상한다.
골퍼는 누구나 스코어에 민감하다. 겉으론 태연한 골퍼라도 캐디가 자기 타수를 높여서 잘못 적으면 바로 정정을 요구한다.
몇 홀 지나서 이를 발견하더라도 소급해서 정확한 기재를 요청한다. 거꾸로 캐디가 1타 적게 적으면 모른 채 지나간다.
동반자 타수를 잘못 적었을 땐 친한 사이라면 보통 캐디에게 제대로 수정을 요청한다. 접대나 낯선 사람과의 골프 혹은 내기가 걸리지 않은 골프에선 남의 스코어에 대체로 후하며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몸을 푼다면서 첫 홀을 모두 파로 통일해서 적는 소위 ‘일파만파’나 ‘무파만파’ 같은 상황에서도 묘한 일이 발생한다. 첫 홀에 본인은 버디, 동반자들은 보기나 더블 보기, 트리플 보기를 했는데 모두 파를 적용할 때다.
언젠가 버디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약속이 없었다며 올 파를 고집하는 동반자가 있었다. 억울하게도 당사자는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버디에서 파로 내려왔다.
마지막 홀에선 좋게 헤어진다는 취지에서 모두 파를 적곤하는데 이때도 묘한 상황이 생긴다. 물론 내기가 걸렸다면 상상하기 힘들다.
평소 경쟁 관계에 있거나 하수가 첫 홀과 마지막 홀에서 올 파 적용으로 스코어에서 우위를 점하면 맘이 편치 않다. 스코어가 동반자 전체 눈에 보이니 어쩔 수 없다.
여기에다 동반자가 나를 이겼다고 스코어 사진을 찍어 대고 자랑까지 일삼으면 무슨 상황인가 싶다. 다른 친구들에게 나를 꺾었다며 동네방네 소문까지 내면 해명도 못하고 속앓이를 한다. 급기야 동창이나 동호회 멤버들에게 알려져 위로 아닌 위로 전화까지 받는 처지에 이르면 미칠 지경이다.
멀리건과 컨시드를 주더라도 마음이 찝찝할 때가 있다. 분명 정확하게 타수를 기재하면 이겼는데 멀리건과 컨시드를 받은 동반자 스코어가 나보다 잘 나왔을 때다. 평소 나보다 고수라면 이날 분명 그를 꺾었는데 스코어론 뒤지니 기분이 묘하다. 상대가 나를 치켜세워줄 법한데 입을 다문다. 자존심 때문이다.
만약 상대가 “오늘도 역시 나를 이기지 못하는군”이라고 말하면 억울하기까지 하다. 항의할 수도 없어 혼자 끙끙댄다.
거꾸로 평소 나보다 뒤지던 동반자가 그날 멀리건과 컨시드를 수시로 받아 이기고는 우쭐하거나 자랑하면 기분 나쁘다. 그냥 자족하며 조용히 있으면 된다.
맨날 데리고 다니던 하수에게 계속 멀리건과 컨시드를 주었더니 어느 날 추월했다. 이렇게 몇 번 이기더니 급기야 나에게 레슨까지 하기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늘 챙기는 골퍼도 있지만 고객 대부분은 스코어가 마음에 들어야 전화번호를 입력합니다. 그날 스코어에 불만인 동반자들을 의식해서인지 몰래 입력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어요.”
경기도 여주CC 캐디의 말이다. 다른 동반자들이 내기에서 돈도 잃고 성적도 엉망인데 혼자 잘 쳤다고 여봐란듯이 스코어를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실전에선 이기고 스코어상으로 졌음에도 흔쾌한 골퍼는 없다. 그냥 공정하게 첫 홀부터 마지막 홀까지 제대로 스코어를 기록하면 된다.
한 살 버릇 여든 간다. 처음에는 사람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사람을 지배한다. 다시 한번 기본 룰을 지키면서 초심으로 돌아가자.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