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공개작 ‘로기완’은 소설가 조해진의 2011년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원작 삼은 작품입니다. 난민 지위를 신청하려는 한 북한 출신 주민의 삶을 추적하는 작품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의 가능성을 묻는 작품이지요. 조해진 소설가의 작품은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일컬어지는데 ‘로기완을 만났다’도 이방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해진 작가의 오랜 독자는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는 200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한국어 강사직으로 체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브뤼셀을 떠도는 북한 출신 주민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바르샤바에서 브뤼셀을 오가며 당시의 경험과 감정을 소설로 작품화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입니다. 이 작품을 전후로 조해진 작가는 평단에서 ‘타자(他者)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13년이 흐른 2024년 한국 현대문학의 최정점에 선 작가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북한 출신 난민 ‘로기완’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사유했던 이 묵직한 소설은, 영화로 몸을 갈아입으며 무엇이 달라졌고 또 어떤 의미 차를 형성했을까요. 배우 송중기가 로기완으로 열연한 작품 ‘로기완’과 이 영화의 원작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북한 출신 남성 로기완의 불운한 생애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낯선 땅 벨기에 브뤼셀에서 부랑자로 살아가는 로기완의 지갑엔 ‘어머니의 시신을 판 돈’이 들어 있습니다. 연길에서 사고로 죽기 전 어머니의 뜻이었고, 그는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 유럽 땅을 밟습니다.
로기완은 브뤼셀에서 난민 지위를 얻어 새 삶을 시작하려 합니다. 조선족 가짜 신분으로 위장해 국경을 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상황과 환경은 꼬일 대로 꼬였습니다. 난민 지위를 받기 위해선 북한 출신임을 증명해야 했는데 그러기엔 서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브뤼셀에서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지 못하면 베이징으로 강제 송환될 것이고, 그곳에서 다시 북한으로 보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생계도 막막했습니다. 가진 돈으로는 머무를 숙소는커녕 당장의 끼니를 챙겨 먹는 일조차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불안정하니 일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래서 그는 공중화장실에서 잠을 해결하며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지옥을 벗어났더니 지옥이 있네요. 그러다 로기완은 어머니 시신의 대가로 받은 전 재산을 강탈당합니다. 로기완은 자신의 지갑을 턴 남한 출신 여성 마리(배우 최성은 분)와 엮이기 시작합니다. 전직 사격 국가대표 출신인 마리는 갱스터들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게임(사격 도박)을 진행하는 선수로 뛰었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였지만, 그건 자신을 망가뜨리려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극한의 비참함에 내몰린 로기완과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린 마리는 자꾸만 얽히기 시작합니다. 로기완은 벨기에 난민심사관에게서 “북한 출신임을 입증할 서류가 없으니 중국으로 강제 송환될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절망합니다. 그 과정에서 갱스터에게 위협받는 마리까지 구출해야 하지요. 조금 거친 요약이지만 여기까지가 영화 ‘로기완’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영화 ‘로기완’이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한둘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두 작품의 주제의식도 다르게 전개되지요. 우선 두 작품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소설의 화자인 ‘김 작가’가 영화에선 제거됐다는 점일 겁니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는 로기완을 관찰하는 한 사람이 화자입니다. 1인칭 시점으로 로기완을 따라가는 작중 화자 ‘나(김 작가)’이지요. 김 작가는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함께 제작하는 작가로 일했던 인물인데, 그는 한 시사주간지 국제란에서 ‘벨기에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북한 출신 주민들’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기사에는 ‘이니셜 L(로기완)’이란 남성이 있었습니다. 김 작가는 L의 말에 이끌려 무작정 벨기에행 티켓을 끊습니다. 브뤼셀에 체류 중인 의사 박을 만난 김 작가는 로기완이 박에게 남겼던 일기장을 건네받습니다.
김 작가가 만들었던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의 ‘고통’을 극대화해 영상으로 전시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매우 극적으로 보이도록 편집하는 일을 진행했던 김 작가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 결국은 ‘ARS 기부를 더 많이 받게 하려는 쓰레기’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래서 작가직을 관둔 바 있습니다. 그런 김 작가에게 ‘브뤼셀의 로기완’이란 새로운 존재는 정말이지 강렬했습니다. 브뤼셀은 난민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는 심사가 진행되는 ‘EU 본부’가 위치한 도시였고, 또 ‘저항을 학습하지 못했던 북한 출신 주민이 남은 인생을 좌우할 거대한 선택(난민 지위 신청)’을 하려는 도시였으니까요.(소설 91쪽, 101쪽 발췌)
하지만 영화에선 김 작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독자-김 작가-로기완’ 구도로 이어지는 소설 속 타인의 고통이란 주제가, 영화에서는 ‘관객-로기완’의 단선적 차원으로 변용된 것이지요. ‘한 인물의 사유와 감정을 렌즈 삼아, 비로소 직시하는 타인의 고통’이란 주제가 영화에선 희석됐다는 결론이 불가피합니다.
두 작품의 두 번째 차이점은, 바로 안락사입니다. 영화 ‘로기완’에서 등장인물 마리의 방황은 엄마가 선택했던 안락사 때문에 촉발됐습니다. 마리는, 아빠 이윤성(배우 조한철 분)이 시한부였던 아내의 선택(안락사)을 막지 않았다는 점에 분노했고, 이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본인 삶을 망가뜨리려 애썼습니다. 갱스터의 세계로 들어가 마약에 취해 처음 보는 남성과 잠자리를 갖지요. 그러나 원작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다루는 안락사는 그보다는 깊은 심연의 문제를 건드립니다.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김 작가는 브뤼셀에 거주하는 의사 박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박은 로기완과 같은 난민들의 ‘진짜 국적’을 판별해 난민 지위를 얻도록 힘써주는 박애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전직 의사였던 박은 안락사 조력 경험 이후 의사일을 관뒀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이지만) 박이 안락사를 도왔던 인물은 박의 아내였지요. 아내는 간암 말기였습니다. 안락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은 양분됩니다. 고귀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멈추는 시도는 반인륜적이라는 비난과, 개인의 고통과 존엄한 죽음을 지지하는 의견 사이에서 안락사는 논쟁적입니다.
의사 박은 김 작가에게 말합니다. 죽기 전의 아내의 신체에선 머지않아 간성혼수 현상이 벌어질 상황이었다고, 악취가 나는 몸에서 배설조차 의지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상황까지 예상되는데, 저 끔찍한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 인간에게 필요한지를 말이지요.(소설 145쪽) 김 작가는 감히 이해조차 불가능한 타인의 고통을 거듭 사유합니다.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무력했고 아무것도 몰랐으며 항상 너무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소설 151쪽)
이때 소설이, 김 작가의 눈을 통해 관조하는 ‘타인의 고통’은 세 층위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만들었던 방송 프로그램 등장인물들(인위적으로 편집된 고통, 소설에서 ‘윤주’)이고, 다른 하나는 브뤼셀에서 만난 의사 박의 아내(죽음을 선택하며 끝내버린 고통)이며, 또 다른 하나는 탈북인 출신 로기완(세상의 끝에 도달한 고통)입니다. 세 사람 중에 로기완만이 유일하게 저 고통의 터널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지요.
박에게서 로기완의 일기장을 건네받은 김 작가는 로기완의 3년 전 삶을 스스로 복습합니다. 브뤼셀에 도착한 그는 로기완이 탔던 버스를 타고, 그가 묵었던 호스텔에 숙박하고, 그가 잠들었던 공중화장실 변기 옆을 배회합니다. 그건 아마도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내부로 이식시켜 보려는 이해의 의례이자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방송 프로그램에서의 ‘편집된 고통’을 떠올리며 행해 보는 속죄로 읽힙니다. 그 과정에서 김작가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소설 10쪽)
로기완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증명서 한 장 없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한 명의 초라한 개인이 되었습니다. 김 작가는 로기완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결국 모든 ‘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영화 ‘로기완’에는 김 작가라는 존재가 없기에, 인간을 인간으로 정립하는 강력한 단서에 대한 질문, 즉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 다소 결여된 느낌입니다. 대신 ‘인간 로기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비참과 인간의 희망에 포커싱하려 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영화 매체라는 제한적 장르에서 원작의 모든 주제의식을 담긴 어려웠겠지요. 그럼에도 영화는 한 인간의 이해라는 점에서 ‘고통에 대한 연민’을 보여줍니다.
‘로기완’은 원작의 김 작가의 시선을 제거한 자리에 ‘로기완이 바라보는 마리의 고통’을 추가해 인간의 연민은 어느 자리에서건 상호적일 수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따라서 로기완과 마리가 느끼는 연민은, 세상의 끝을 경험 중인 인물들만이 나눌 수 있는 어떤 인사이자 악수 같은 감정이었지요. 연민을 넘어서는 사랑, 그것만큼 아름다운 순간도 없을 겁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