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벼운 골프용품을 선물로 고르라고 하면 주저 없이 공을 택한다. 예전엔 장갑이나 모자, 파우치, 목도리 등을 골랐지만 요즘은 공이 제일 좋다. 특히 유명 브랜드 흰색이나 연두색 컬러 공을 선물로 받으면 너무 감사하다.
이런 새 공을 티샷을 하자마자 잃어버리면 가슴이 에이는 듯하다. 그래서 골프장에 가면 바로 새 공을 꺼내지 않고 몸이 풀리거나 평이한 코스에서만 사용한다.
골프장과 잠수복. 인터넷에 이 두 검색어를 연결해 입력하면 해마다 관련 뉴스가 뜬다. 밤에 몰래 잠수복을 입고 연못(워터 해저드)에 빠진 골프공(로스트 볼)을 건져내 팔아 넘긴 범인이 붙잡혔다는 내용이다.
지난해에는 서귀포에서 발생했다. 골퍼와 직원들이 퇴근한 심야에 골프장 연못에 들어가 1년 4개월간 골프공 15만 개를 훔친 일당이 덜미를 잡혀 입건됐다.
특수절도로 송치된 이들은 60대로 최근까지 제주 골프장 20곳을 돌면서 유사한 행각을 벌였다. 일당은 잠수복과 목만 보이는 가슴 장화를 착용하고 연못에서 긴 집게 모양을 한 회수기로 섬진강에서 재첩을 잡듯이 바닥에 있는 공을 건져냈다.
수거한 골프공은 전문 매입꾼에게 개당 200원에 넘겨 그동안 3000만원 이익을 챙겼다. 흠집과 코팅 상태에 따라 분류한 다음 등급이 매겨져 상급품은 10개에 1만원으로 다시 팔려 나갔다.
로스트 볼은 연습용이나 초보자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공을 수거한 일당은 현행범, 판매한 사람들은 장물취득 혐의로 입건됐다.
“계란 한 판 날렸다.” “짜장면 한 그릇 날아가버렸네.”
필드에서 공을 잃을 때마다 나오는 탄식이다. 골프 도중 꼭 공 한두 개를 잃어버린다. 갓 꺼낸 타이틀리스트 공이나 연두색 형광 컬러 볼이 숲과 연못에 들어가면 가슴이 쓰리다. 로스트 볼은 골프 도중 3분 이내에 플레이어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 공으로 규정된다. 2019년 바뀐 골프 규정에 따라 5분에서 3분 이내로 단축돼 로스트 볼 개수가 더 늘어났다.
주인을 떠난 로스트 볼 운명이 궁금하다. 이 공들은 우연히 다른 골퍼 손에 들어가거나 전문 업체를 거쳐 새로 탄생해 유통된다. 이를 수거해서 다시 팔면 짭짤한 수입이 된다. ‘골프장 속 진주’라고도 한다.
이 메커니즘을 알려면 로스트 볼 법적 소유권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민법상 로스트 볼은 소유주가 없는 공이다. 골퍼가 분실된 공을 찾으려고 아주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거나 골프장 측에 별도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다면 소유권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 이런 식으로 공에 집착하는 골퍼는 없다.
로스트 볼은 먼저 선점한 사람이 소유한다. 민법에서 규정하는 무주물 선점인데 말하자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이다. 따라서 골프 도중 로스트 볼을 발견하면 별다른 절차 없이 가져가도 법적으로 문제없다.
물론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은 캐디에게 물어보고 취득 여부를 결정하는 게 좋다. 다른 코스에서 날아온 공을 캐디 허락 없이 주워서 가져가면 시비 소지가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골프장은 1년에 한두 번씩 로스트 볼을 수거해 짭짤한 수입원으로 잡는다. 골프장은 대개 겨울철 휴장 기간에 해저드 물을 빼내 코스를 관리한다. 이때 공을 자체 수거해 개당 250원 정도로 전문 매입 업체에 넘긴다.
여주 소재 골프장 관계자에 따르면 로스트 볼 수익금이 많게는 수천만원에 달한다. 보통 골프장 운영비로 사용하지만 사회단체에 기부도 한다.
워낙 로스트 볼이 많다 보니 골프장과 전담 계약을 맺고 매달 수거하는 사례도 있다. 이들 업체는 로스트 볼을 수거해 직접 세척과 페인팅 작업을 거쳐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골프장 근처 음식점이나 골프숍에서 파는 로스트 볼은 보통 이런 경로를 거쳐 나온 것이다.
18홀 골프장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로스트 볼 6000~8000개가 수거된다. 이 가운데 햇빛과 물속에 오래 방치됐다면 세척과 페인팅을 통해 새 공으로 탄생한다.
벗겨지거나 까진 표면을 페인팅하고 코팅 처리한다. 이렇게 재탄생한 공을 리피니시 볼(refinish ball·재생공)’이라고 한다. 리피니시 볼은 공정에 들어가기 이전 상태에 따라 몇 등급으로 나뉜다.
흠집과 펜 마킹이 많고 색깔이 바랠수록 그레이드가 내려간다. 등급은 A+부터 C0까지 다양하다. 리피니시 볼 판매 업체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개당 ▲타이틀리스트 1300~1500원 ▲커클랜드 800~1000원 ▲볼빅 990~1100원 ▲세인트나인 790~900원 선이다.
주인을 떠나 새로 태어난 공은 보통 초보 골퍼에게 간다. 라운드 도중 분실 가능성이 크기에 비싼 새 공 대신 저렴한 리피니시 볼을 주머니 가득 넣고 사용하면 경제적이다.
초보는 리피니시 볼의 최대 단점인 비거리나 스핀 저하 등 미세한 기능 차이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고수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물을 오래 머금은 공은 숲에서 버틴 공보다 탄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성능도 저하된다.
골프용품업계에 따르면 고물가로 생활고가 심해지면서 로스트 볼 매장을 창업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주로 부부 단위나 1인 창업이 많다. 인건비와 임대료를 빼고도 수익률이 2배가량 양호하고 초기 자본도 4000만원 이하로 부담스럽지 않다.
타이틀리스트 브랜드를 내놓는 아쿠쉬네트를 보유한 휠라코리아는 아예 미국의 중고 골프공 쇼핑몰인 로스트골프볼닷컴을 인수했다. 이 쇼핑몰을 통해 한 해 미국 전역 골프장에서 중고 골프공 5000여 만 개 이상이 수거돼 리피니시 볼로 유통된다.
현재 우리나라 골프공 시장 규모는 연간 1300억원대로 이 가운데 로스트 볼 점유율은 25% 정도로 추정된다. 프로선수가 골프용품 가운데 가장 신중하게 교체하는 것은 뭘까. “드라이버를 바꾸면 드라이버만 연습하면 되지만, 공을 바꾸면 모든 클럽을 다 연습해야 하죠.”
타이거 우즈는 골프공은 라운드 중 필수이자 그 자체로 목적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선수들은 후원사에 따라 클럽을 바꾸지만 공은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공을 우습게 봐선 안 되는 이유이다.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4호 (2024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