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룰이라면서 너무 분위기를 칼같이 몰고 가니까 좀 부담스러워요. 동반자는 물론 캐디나 골프장 직원들에게 조금이라도 틈만 보이면 훈계를 하니 괜히 옆에서 멋쩍어요.”
지인이 나이 든 선배와 종종 골프를 하면서 겪는 일을 들려줬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터라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져 불편한 마음마저 든단다. 퇴직하면 옛 직장 동료나 친구끼리 모임을 만들어 골프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멤버 가운데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보통 세 가지 이유에서다. 바로 비용, 건강, 성격 문제다.
건강과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성격이나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면 외톨이 골퍼가 된다. 함께 클럽을 휘두를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연히 고교나 직장 후배들에게 눈이 간다. 물론 본인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후배들과 어울릴 수 있다.
“후배들이 골프에 초청하면 일절 간섭하지 않아. 하자는 대로 따르고 늘 일정에 늦지 않도록 민첩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편이야.”
일흔을 넘긴 고교 선배가 젊은 후배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비결을 알려줬다. 골프장 여건, 부킹 시간, 팀 배정, 룰, 음식 등 어떤 것을 결정하더라도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동반자들이 결론을 내지 못해 의견이나 지혜를 구하면 그제서야 사견을 전제로 조심스레 입을 연다. 대세를 따르는 자세가 몸에 뱄다. 평소 입은 닫고 있지만 행동은 민첩하다. 카풀 시간, 티오프 타임, 식사 시간은 철저하게 엄수하며 5~10분 일찍 도착하는 것을 덕목 1호로 삼는다. 행동이 굼뜨다는 인식을 피하고 싶어서다. 골프 모임에 초청하면 시간과 거리를 불문하고 웬만하면 응한다. 한번 거절하면 초청 건수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잘 안다.
초청에 대한 답례로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헤아린다. 동선이 비슷한 동반자가 있으면 본인 차로 카풀을 제의한다. 역으로 카풀 제의를 받으면 항상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고 운전자에겐 가벼운 간식이나 식음료를 제공한다. 경우에 따라선 스킨스 비용 일부를 대신 지불한다. 경기 도중 동반자 매너나 룰을 지적하는 꼰대 짓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에게 서운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어서다. 스코어 때문에 관계를 서운하게 몰고 갈 이유가 없다.
후배들에게 환대받는 시니어 골퍼는 지갑을 여는 데에도 후하다. 젊은 사람과 자로 잰 듯 계산하지 않는다. 간혹 모임 식사 비용을 알아서 지불하거나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면 인기는 더욱 올라간다. 그렇다고 해서 생색을 내거나 흐름을 주도하면 역효과를 낸다.
언젠가 지갑을 좀 연 60대 후반 동반자가 걸핏하면 셀프 멀리건과 컨시드를 남발해 빈축을 샀다. 본인 경기가 풀리지 않는다고 술판을 만들어 성의 없이 클럽을 휘둘러 동반자들에게 불편을 초래한 사례도 있다.
동반자들 점심 식사 비용까지 대신 지불하고 오후에 골프를 했는데 독불장군 그 자체였다. 멋대로 경기를 주도하고 캐디에게 원하는 스코어를 강요하는 등 도무지 진지함을 찾기 어려웠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구력이 있다고 수시로 가르치려 드는 사람도 꼰대로 취급받아 기피대상이다. 물론 부진한 후배를 보면서 안타까워 그렇겠지만 습관으로 굳어진다.
“우리 사회는 수직적 위계화가 강해 선배나 배운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거나 자기가 좀 더 안다고 생각하면 조언하고 이끌어야 한다며 자신을 압박하죠.”
꼰대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 대한 사회학자 오찬호 씨의 심리분석이다. 골프에서 특히 이런 심리가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퇴직하고 모처럼 직장 선후배끼리 편안하게 골프를 하는데 선배가 후배에게 정색하고 룰을 지적하며 분위기를 흐린 사례도 있다. 물론 후배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반복적으로 훈계를 하니 다른 동반자들마저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주제로 대화하되 주로 경청하고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잘 헤아려야 합니다. 가능하면 말을 아껴 젊은 사람들이 모임과 대화의 주역이 되도록 살짝 비켜나는 게 좋죠.”
김태영 한국대중골프장협회 부회장은 정치나 종교 등 민감한 주제도 자칫 분위기를 해친다고 말한다. 자기 생각을 불쑥 끄집어내 동조를 강요하거나 예단하면 곤란한 자리가 되기 십상이다. 혹여 동반자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위계가 엄했던 직장 선후배 사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사장이나 임원으로 퇴직해 평직원 출신들과 골프 모임을 계속하려면 멘털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김 부회장은 조언한다. 오죽하면 대기업 임원에서 퇴직하면 사회부적응자라는 말도 있다. 직장생활도 지나고 나면 골목대장 놀이에 불과하다. 생계 때문에 위계에 따라 행동했지만 퇴직하면 완전 무장해제된다. 계급장은 사라지고 인격 대 인격으로만 남을 뿐이다.
현역시절의 사무적이고 지시형인 말투로 동반자들을 대하면 기피 대상이다. 결국 입은 다물고 지갑을 잘 열면 얼마든지 젊은 사람과 어울린다. 노년에 상남자로 젊은 사람과 골프로 소통하는 비결이다. 나이가 결코 소통의 적이 아니다.
“나이를 생물학적 기준이 아닌 소통을 기준으로 한다면 연암 박지원은 얼마나 젊은지 몰라요. 200년이나 후배인 저와 책으로 소통을 하니까 말이죠. 그냥 선배와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 같아요.”
젊은 문학가가 연암 박지원의 문학세계를 평가하며 들려준 말이다. 70대 노인과 10대 젊은이가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는 게 골프이다.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