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포도는 수백 가지가 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또는 피노 누아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으로 한정된다. 오랫동안 자기 취향을 만들어온 애호가일수록 더 그런 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는 프랑스 보르도와 미국 나파 밸리에서 많이 재배되는 포도로, 두 포도 중에 하나만을 가지고 와인을 만들거나 두 가지 포도를 블렌딩해 와인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1865’ ‘몬테스 알파’ ‘샤토 탈보’ ‘알마비바’ ‘오퍼스 원’ 같은 와인들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들은 묵직하고 중후하며 오랫동안 숙성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다섯 명의 소비자 중에 세 명 정도는 대체로 카베르네 소비뇽이 블렌딩된 와인들을 선호한다. 이와 상대가 되는 피노 누아 포도로 만든 와인들은 체리향으로 대표되는 붉은색 과일 향과 맛이 지배적이며 섬세하다. 내 경험으로는 다섯 명 중에 한 명, 혹은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소비자들이 피노 누아를 좋아한다.
피노 누아 포도는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주로 재배되는데,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들은 대체로 산도가 높아 처음 와인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다.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부르고뉴 와인은 팔기가 몹시 어려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조차도 우리나라에서는 판매처를 구하지 못해 유통 회사의 창고에 재고로 남는 경우가 많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성장하고 소비자들의 입맛도 서구화되면서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은 없어서 팔지 못하는 와인이 되었다.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의 인기는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현상이다. 와인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애호가일수록 부르고뉴산 와인을 찾는다. 수요가 늘고 장사가 잘 되다보니 부르고뉴의 유명 생산자 집 앞에는 전 세계 유통 회사 바이어들이 줄을 선다. 우리나라 와인 수입회사들 사이에도 부르고뉴 와인의 유통권을 뺏고 뺏기며 얼굴을 붉히는 시비가 많아졌다.
부르고뉴 와인이 인기를 끄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우선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은 마시기가 쉽다. 병입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추가적인 숙성을 하거나 마시기 전에 수 시간 동안 디캔팅을 해야 하는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과 달리 대부분의 피노 누아 와인들은 따자마자 바로 마셔도 무리가 없다. 부르고뉴 와인이 최근 성공을 거두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평균적인 품질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부르고뉴산 와인들을 잘 고르기 위해서는 2가지를 동시에 봐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포도밭 혹은 포도가 재배된 마을의 이름, 두 번째는 생산자의 이름이다. 똑같은 포도밭에서 재배된 포도라고 할지라도 마치 서로 다른 셰프가 요리를 하는 것처럼 와인 메이커가 다르면 전혀 다른 맛을 낸다. 과거에는 생산자에 따라 품질의 차이가 컸지만 최근에는 와인을 맛없게 만드는 생산자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부르고뉴 와인의 평균적인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지난 2019년부터 부르고뉴 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프랑수아 라베는 클로 드 부조의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와인 메이커인 동시에 지역 농부들에게 끊임없이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리더이기도 하다. 부르고뉴의 양조가들은 여행을 하지 않고 자기 동네에만 머무르면서 와인도 자기가 만든 와인만 마시고 과거에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와인을 만드는 완고한 농부의 이미지가 강하다. 프랑수아 라베는 오래전부터 지역 농부들에게 다른 세상의 와인을 맛보며 트렌드의 변화를 읽고 외부 전문가들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다.
최근 부르고뉴 와인 품질의 성장은 컨설턴트들의 성장과 연관이 있다. 외주 시스템이 자리 잡은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들처럼 포도밭을 물려받은 와인 메이커들의 자녀들 중에는 파리 같은 대도시에 머물며 농장의 일은 전적으로 컨설턴트에게 맡기고 판매에만 관여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이다.
프랑수아 라베가 완고한 부르고뉴의 농부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뛰어난 친화력도 있었지만 그 역시 세계적인 고급 와인을 만드는 와인 메이커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샤토 드 라 투르 양조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클로 드 부조 포도밭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클로 드 부조 포도밭은 시토 수도회 소속의 수도승들이 오랫동안 일구어온 유서 깊은 포도밭으로, 현재는 80명이 넘는 생산자들이 포도나무 그루 단위로 나누어 수확하여 와인을 만든다.
클로 드 부조는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품질이 다르며 대체로 클로 드 부조 성에 가까운 포도밭에서 나온 와인일수록 품질이 좋다. 프랑수아 라베가 만드는 샤토 드 라 투르 클로 드 부조(Chateau de La Tour Clos de Vougeot)는 매우 진하고 중후하며, 오랫동안 보관할수록 점점 뛰어난 맛을 내는 최고의 클로 드 부조 와인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