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인 귀도 카발칸티의 유명한 발라드 ‘나에게 아무 희망도 없으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피렌체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1300년 격렬한 정쟁에 휘말려 단테 알리기에리와 함께 고향에서 추방됐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망명한 시인은 슬픔과 절망에 몸부림치다 말라리아에 걸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카발칸티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단테와 함께 ‘청신체(淸新體)’를 대표한다. ‘사랑의 탐구자’였던 그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사랑의 철학적·영적·심리적·사회적 효과를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피렌체 일상어인 토스카나 말을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고상한 언어’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 시에서 추방당한 시인은 언어에 사랑을 가득 담아서 고향의 연인에게 날려 보낸다. 제목 그대로 답장을 받으리라는 아무 희망도 없기에 그의 사랑은 더욱더 절실하다. 날개를 달고 연인에게 날아가는 경쾌하고 날렵한 사랑이 무겁고 우울한 시인의 처지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시인은 부사 셋을 연이어 써서 사랑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감싼다. ‘곧바로’는 이 사랑의 긴급성을 암시한다. 사랑의 고백은 시인의 입술을 떠나자마자 다른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연인에게 날아간다. 불우한 처지에 빠진 시인은 더는 곁에 없고, 만나기 힘든 연인에게 절절히 호소한다.
‘내 목소리가 그대 귓가에 영원토록 울리게 해주오. 나를 기억해 주오.’
‘부드럽게’는 이 사랑의 세련됨을 보여준다. 시인의 사랑은 거칠거나 사납지도, 천하거나 막돼먹지도 않다. 극도로 힘겨운 처지이나 시인은 기품 있고 우아한 말들을 고르고 골라서 연인에게 속삭인다. 사랑은 부르짖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가만가만 나지막이 호소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은유가 언제나 시끄러운 고함을 넘어선다.
‘가볍게’는 비참한 현실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시인의 강렬한 소망을 상징한다. 사랑할 때 인간은 새가 된다. 수시로 연인 곁으로 날아간다. 감각은 들뜨고, 생각은 뜨거워지며, 언어는 민감해진다. 사랑은 현실의 무거움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연인은 멀리 있으나 사랑의 말은 바람처럼 그녀의 귀에 닿으리라. 시인은 언어에 날개를 달고 날아가라고 명령한다. “가라, 나의 여인에게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를 에피아 프테로엔타(epea pteroenta)라고 불렀다. 에피아(epea)는 서사시를 뜻하는 에픽(epic)과 같은 말로, ‘말 또는 노래’를 뜻한다. 이때의 말은 일상의 범속한 언어가 아니라 영웅의 언어, 즉 의미를 품은 말이다. 프테로엔타(pteroenta)는 ‘날개를 단’이라는 뜻이다.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비둘기처럼 날개를 달고 있다.
시는 지상의 언어를 천상의 언어로 변화시킨다. 덧없이 흩어지는 일상을 붙잡아 의미를 불어넣음으로써 불멸성을 창조한다. 아름다움이란 영원을 순간 속에서 보는 일, 성스러움을 속됨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시인은 언어에 날개를 달아서 우리 삶이 허무하지 않고, 우리 인생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이처럼 문학은 현실의 중력에 날개로써 저항한다. 현실의 언어는 무겁고, 문학의 언어는 가볍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카발칸티가 날개 달린 언어로 사랑을 구원했듯이, 상상력은 새로운 삶을 창조함으로써 비루한 현실을 무찔러 해방한다. 가벼움이 무거움을 이긴다.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에디토리얼 펴냄)에서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역사를 움직이는 냉혹한 힘”에 맞서서 ‘가벼움’을 옹호한다. 칼비노는 우울하고 무거운 현실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에 비유한다. 메두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을 모조리 돌로 변화시킨다. 딱딱하게 굳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결박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사랑을 얻기 위해 페르세우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메두사 주변을 날아다닌다. 가볍게 바람에 몸을 싣고, 현실의 노예가 되기를 회피한다.
현실에 붙잡히는 사람은 고통과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껏해야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려고 6펜스짜리 은화를 벌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다. 마음에 달을 품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가벼운 정신만이 메두사의 목을 베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인간은 은빛 동전이 아니라 은빛 달을 지향할 때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현실, 즉 메두사는 일종의 중력이다. 메두사는 우리를 돌로 만들어 운명에, 의무에, 질서에, 책임에 붙들어 맨다. 메두사를 직시하는 사람은 돌이 되어 얼어붙을 뿐 절대 메두사를 잡지 못한다.
페르세우스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전혀 다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메두사를 보되,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직접 보지 않는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에만 시선을 둔 채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그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기회를 노린다. 현실은 단단한 방패로 이루어진 꿈을 통해서만, 즉 흐릿하게 비추어 볼 때만 제대로 보인다. 너무 멀리 날아서도 안 된다. 페르세우스처럼 현실의 곁을 떠나지 않되, 현실의 목을 치려는 꿈을 품은 사람만이 새로운 인생을 창조한다.
칼비노는 말한다. “페르세우스의 힘은 그가 살아야 했던 괴물 세계라는 현실, 항상 함께해야 하고 짐처럼 짊어져야 할 현실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직접 보기를 거부하는 데에서 나온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치자 흘러내린 피에서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가 태어난다. 돌은 날개로 진화할 수 있다. 상상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현실을 꿈으로 변화시킨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 그러나 말에 날개를 달면 시가 되듯, 현실에 붙잡히지 않고 날개를 단 것처럼 움직이는 사람은 천사가 될 수 있다. 칼비노에 따르면, 이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지혜이다.
“가뭄이나 질병 혹은 사악한 세력으로 인해 부족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샤먼들은 “자기 육체의 무게를 없애고 현실을 변화시킬 힘을 찾을 수 있는 다른 세계, 다른 인식의 차원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현실의 무게를 털어버리고 황홀경 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공동체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중세의 여성들은 밤마다 마녀가 되었다. 그녀들은 “한밤중에 빗자루 손잡이를 타거나, 이삭이나 지푸라기처럼 아주 가벼운 탈것에 몸을 실은 채” 가혹한 현실과 무거운 운명을 강요하는 마을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날개 달린 언어가 무거운 현실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인생은 꿈을 닮을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