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점심 먹을 궁리를 하며 TV를 켰다가 한동안 멍하니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나라 배우들이 스위스의 풍경 속을 누비고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툰 호수가 넘실대고, 아침에 일어나 텐트 문을 열면 그린델발트가 앞마당처럼 펼쳐진다. 올여름에는 유럽이 전례 없는 폭염에 시달리며 알프스의 빙하까지 녹아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건만, 적어도 화면 속 알프스의 그림 같은 풍경은 여전해 보였다.
이내 알프스를 여행했던 과거의 추억들이 소환됐다. 어느 여름 브람스의 휴가지들을 돌아보며 들렀던 툰 호반의 눈부신 풍광, 배낭여행으로 처음 유럽에 갔을 때 융프라우 산악열차에서 감탄을 연발하며 바라보았던 그린델발트의 경이로운 산세가 뇌리의 심연으로부터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이 듣고 싶어졌다. 대편성 관현악의 음률로 알프스의 장엄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을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내는 그 곡! 다만 이 대작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스위스 알프스의 그것은 아니다. 대신 독일과 오스트리아 접경지대에 걸쳐 있는 ‘바이에른 알프스’를 만날 수 있다.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교향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대개 약칭인 ‘R. 슈트라우스’로 쓴다)는 구스타프 말러와 더불어 리하르트 바그너 이후의 독일 후기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말러는 오스트리아령 보헤미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슈트라우스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말러 음악에 비해 도회적 세련미와 낙천적 유희성이 두드러진다. 친구 사이였던 말러처럼 정상급 지휘자로 각광받기도 했던 그가 작곡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교향시와 오페라였다. 교향시란 문학, 회화, 역사, 철학, 자연 등 음악 외적인 소재를 다루는 관현악곡으로 19세기 중반 프란츠 리스트가 창시한 장르다. 슈트라우스는 특히 젊은 시절에 교향시 창작에 주력했는데, ‘돈 후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 ‘영웅의 생애’ 등의 제목이 붙은 그의 교향시들은 해당 장르의 정점에 위치한 걸작들이다.
‘알프스 교향곡’은 (비록 제목은 ‘교향곡’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슈트라우스의 마지막이자 가장 규모가 큰 교향시이다. 슈트라우스는 인생의 절정기에 내놓은 이 대작에서 과거의 추억에 기대어 만 하루 동안 진행되는 산행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등산객이 마주치는 갖가지 풍경들과 상황들을 그렸다. 이것은 슈트라우스 특유의 탁월한 관현악 기법이 돋보이는 음악의 풍경화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묵상이 담겨 있는 서사시이다. 아울러 그 등산과 하산의 여정에는 마치 어느 인생의 일대기가 투영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과 인생이 투영된 풍경화이자 서사시
곡은 먼저 등산에 나서기 전,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산 아래 마을의 새벽 풍경을 고즈넉이 부각하며 출발한다. 어둠 속에 자리한 산의 윤곽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위로 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장엄하게 그려지고 나면, 이내 산행이 시작된다. 힘찬 발걸음으로 호기롭게 출발한 등산객은 우뚝 솟은 암벽을 바라보며 위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숲에서 들려오는 사냥꾼들의 뿔피리 소리에 용기를 얻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울창한 숲속으로 진입하여 시냇물을 따라 걷기도 하고 폭포수 주변의 환상적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기도 한다. 꽃들이 만발한 초원과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을 지난다. 그 정취에 취해 있다가 길을 잃어 덤불에서 고생하기도 하고, 발이 미끄러지고 낙석이 구르는 빙하에서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
위기에서 벗어난 다음 순간 그는 마침내 정상에 오르고,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막한 장관을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바라보다 최고조의 감격과 희열에 이른다. 이 장면에서 오케스트라는 그야말로 벅차고 눈부신 총주를 터트리고, 거기에 파이프오르간의 초월적인 음률까지 더해져 위대한 대자연과 왜소한 인간의 대비를 절감하게 한다.
하산 과정은 사뭇 험난하다. 정상에서부터 피어오르던 안개는 어느 순간 빗방울로 바뀌고, 급기야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등산객은 비바람에 휘청거리며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하산을 서두른다. 오케스트라는 바람소리, 천둥소리를 내는 악기까지 동원하여 굉음을 뿜어내고, 그 광포한 음률은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을 무자비하게 압박해오는 자연의 분노, 그 엄혹한 위용을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묘파한다. 긴박한 시간을 보내고 무사히 마을에 도착하자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저녁 무렵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오르간 소리가 위로처럼 마음을 적시고, 그는 감회에 젖어 지난 하루의 여정을 찬찬히 돌아본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다채로웠던 산행의 여정은 조용히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