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부르고뉴에 거주하던 2004년 여름. 지금은 작고한 피터 현 선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유난히 하얗게 느껴졌던 편지지에는 타자기로 친 정연한 문장으로 “미개한 부르고뉴에 있지 말고 프랑스 문화의 심장인 루아르 지역으로 빨리 건너오라”는 농담 섞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1927년에 태어난 피터 현 선생은 미국과 유럽의 지도층에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린 언론인으로, 당시 프랑스 루아르의 작은 고성에서 노년을 지내고 있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르고뉴야말로 진정한 성지지만, 와인 밖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시야로 볼 때 이곳은 작은 시골에 불과하다. 부르고뉴 공국은 역사적으로 강한 군대와 신앙심이 깊은 수도원들이 있었으나, 르네상스와 같은 문화적인 풍요를 누렸던 지역은 아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의 정원이라 불리는 루아르 지역은 프랑스 귀족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루아르 강을 따라 아름다운 고성들이 줄지어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말을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이렇게 피터 현 선생의 초대로 1년간의 루아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피터 현 선생의 저택이 있는 크리세 마을은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출병했다는 시농 성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크리세 마을을 포함한 인근 마을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시농 와인이라고 불린다. 이 지역에서는 주로 카베르네 프랑으로 만든 레드 와인을 만들며 로제 와인과 슈냉 블랑이라는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도 일부 생산된다.
루아르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이 지역의 여러 와인들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농 와인들이 가격 대비 품질은 좋지만 오래 보관하는 최고급 와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결론을 내렸다. 루아르의 생활을 마치고 보르도 생테밀리옹으로 이사 가기 바로 전날, 마침 싱가포르에서 지인이 찾아왔다. 내 환송회를 해준다며 시농 성 인근의 고급 레스토랑에 초대했다. 그날 오픈한 와인은 베르나 보드리의 시농 1990년산 와인이었는데, 그 와인의 향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풍미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후 시농 와인에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고, 이 지역의 뛰어난 와인을 한국에 소개할 기회도 모색했으나 늘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2010년 6월 루아르 지역의 일간신문 누벨 리퍼블릭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보여, 현지에서 시농 와인과 한식의 푸드 페어링을 준비한 적이 있다. 시농 마을 최고의 와인 메이커들이 참가한 작은 시음회에서 처음으로 이 지역의 최고 와인으로 꼽히는 필립 알리에의 클로드와 필립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이 부부는 포도밭의 일이 많아서 늦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 부부의 손톱에는 포도밭의 흙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필립 알리에는 4개의 레드 와인과 1개의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그들의 레드 와인들은 다른 시농 지역의 와인들처럼 100% 카베르네 프랑으로 만들어진다. 보르도에서는 카베르네 프랑을 블렌딩 목적으로 사용하는데, 왜 이곳에서는 주품종으로 사용되는지 궁금했다. 사실 이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카베르네 프랑은 원래 루아르 지역에서 먼저 재배되었고 보르도로 건너 온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수확기의 카베르네 프랑은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익는다. 프랑스 농부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에 하나는 우기가 빨리 와서 농작물을 망치는 것이다. 보르도의 농부들이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밭 옆에 카베르네 프랑을 심어둔다면, 우기가 조금 일찍 와서 카베르네 소비뇽을 잃어버리더라도 카베르네 프랑으로 와인을 만들 수 있다. 반면 보르도보다 날씨가 추운 루아르 지역에서는 포도가 더 천천히 익기 때문에 날씨만 잘 만나면 더 좋은 품질의 카베르네 프랑을 수확할 수 있다. 과거 이 지역의 기후 영향으로 12도가 넘는 와인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세계적인 기후변화와 양조기술의 변화로 더 높은 도수의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필립은 1980년대 초 삼촌으로부터 와이너리를 이어받아 기존에 생산되던 와인에 2개의 새로운 와인을 더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시농 최고의 와인으로 꼽히는 코토 드 누아레이다. 필립에 따르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와인은 5대 샤토라고 불리는 보르도 최고급 와인이다. 그 의미는 숙성잠재력이 뛰어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건강한 와인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필립 알리에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오래 숙성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어리게 마셔도 매우 뛰어나다는 데에 있다. ‘필립 알리에 코토 드 누아레(Philippe Alliet Chinon Coteaux de Noire)’는 잘 익은 보르도 와인의 과일향이 나지만, 종종 오래된 피노 누아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고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