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분위기를 보면 코로나19가 엔데믹으로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모두들 새로운 마음으로 들떠 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부터 새롭게 문을 연 미술관과 박물관 들이 오랜만에 좋은 전시로 관객들을 맞는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한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8월 28일까지)은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소장했던 문화재 미술품들을 유족들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기증한 뜻을 다시 새기고자 하는 전시다. 앞으로 그 기증품을 토대로 어떻게 채우고 보태서 보다 완성된 국가의 컬렉션으로 만들어 나갈까를 고민하게 하는 ‘기증받은 이들’의 책무를 생각하게 하는 전시였다. 약 54%에 달하는 기증품이, 보다 깊은 연구와 해석이 필요한 책과 문서라는 점은 기증받은 이들의 추후 연구과제가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증품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스펙트럼이 만만치 않다. 전시는 4개의 테마로 나누어 마치 어느 집에 초대되어, 집안을 둘러보는 형태로 구성됐다. 약 2만 점이 넘는 기증품 중에 350여 점을 가려 만든 전시니, 빼어난 중에 빼어난 것들로 전시장은 가득하다.
<삼현수간첩>(보물), 성혼·송익필·이이 씀, 조선 1560~1593 작성, 1599년 편집, 종이에 먹, 38.5×27.5㎝, 국립중앙박물관, <일광삼존상>(국보), 삼국시대 6세기,
청동에 금도금, 높이 8.8㎝,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객들은 겸재의 <인왕제색도>나 모네의 <수련>에 몰리지만, 이 전시의 묘미는 슬쩍 물러서서 숨겨진 보물을 찾아보는 데 있다. 실학자 정약용의 <정효자전>과 <정부인전>은 그의 정갈한 글씨에서 아취가 묻어난다. 조선 중기, 구봉과 우계 그리고 율곡이 20대부터 약 30여 년을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삼현수간첩>(보물 1425호)은 당시 그들의 일상은 물론 편지로 성리학에 대한 열띤 토론을 주고받았다. 조선시대 과거에 드는 일은 집안의 경사였다. <세년계회첩>은 1601년 이경엄이 문과에 급제해 집안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 일을 기념해 화원이었던 이신흠에게 부탁해 1604년 꾸민 회첩이다. 그림은 맑고 곱고 군더더기가 없어 정갈하다.
신명연과 대원군 이하응, 김응원의 난을 한꺼번에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다. 사군자의 난초가 고매한 선비의 인품을 뜻한다고 배웠지만, 세 사람의 난초를 보면 난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 것을 알 수 있다. 녹색이 빛처럼 눈이 부신 해강 김규진의 <대나무>는 전통화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군자를 실험하는 듯하다. 예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으나 예산이 부족해 소장하지 못한 작품인데 이 전시에서 다시 만나 오래전 헤어진 친구를 보듯 반가웠다. 전시는 8월 28일까지 이어지는데 작품 보존 때문에 중요 작품이 교대로 전시되어 다 보려면 네 번은 발걸음을 해야 한다.
청와대가 개방되어 인파가 몰리는 삼청동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히토 슈타이얼(1966년~ )이 우리를 기다린다. 다소 생소한 ‘무빙이미지 아티스트’라고 소개되는 그의 전시는 요즘 말로 핫한 전시지만 그 핫함의 내용이 좀 다른, 오늘을 성찰하게 하는 전시다. <데이터의 바다>(9월 18일까지)라고 명명된 그의 전시는 원래 영화를 전공했던 이력 때문에 현란한 영상작품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다소 소란스럽고 뜬금없는 화면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철학적인 작품들이다. 또 다른 인간의 생존환경이 된 미디어, 즉 데이터와 알고리즘, 소셜 미디어라는 감옥에 갇혀 통제되고 그 굴레에 속박되어 있지만 되레 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한다고 착각하는 오늘의 현실을 느끼면 잠시 아찔해진다.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이 기후변화보다 더 빠르게 인류의 종말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 밖에도 가볼 만한, 아니 꼭 봐야 할 전시가 한둘이 아니다. 한정된 지면 사정에 간단하게 몇 개의 전시를 더 돌아보기로 하자.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면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해 <나, 너의 기억>(8월 7일까지)을 돌아보자. 우리의 기억은 나의 경험과 생각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또는 받아들여진 기억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에 이어 삶과 오늘을 성찰하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를 보면서 연출과 디자인의 과함은 조금 아쉬웠다.
히토 슈타이얼 전시에 나온 <소셜심>(2020) 스틸
용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에서 열리는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8월 14일까지)전은 그의 회고전 성격의 전시다. 오늘날 사진을 현대미술의 반열에 올린 몇 명의 사진작가 중 한 명인 그의 사진은 “사진이되 사진이 아닌 것”이 특징이다. 그는 현장을 찍지만 사진 속 대상들을 엄격하고 획일적이며, 규칙적으로 통일되고 정형화된 하나의 요소로 한정시키는 유형학적 사진을 원근감을 없애 평평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사진을 이용한 그림이다. 즉 출발은 현실이나 자연이지만 이를 스튜디오에서 합성과 수정을 가해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 특히 2007년 평양에 가서 찍은 아리랑 축전은 그의 사진에 대한 철학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전체에 속한,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거대한 사진 속 작은 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사동의 호림박물관도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기억>(6월 30일까지) 전을 열고 있다. 소장품 중 선별한 도자, 토기, 철기, 회화 등 170여 점이 우리 눈을 띄워준다. 시간이 나는 이들에게는 신림동에 있는 본관도 들러볼 것을 권한다. 서울 시내에서 선경에 들어선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설립자인 호림 윤장섭(1922~2016년)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박물관 수집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해외에서 환수해 온 유물들이 반갑다.
혹시 제주도를 여행할 예정이라면 제주도립미술관의 <엄마, 가짜라서 미안해요>(8월 21일까지)전을 보는 것은 덤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 한국 미술의 혁신적인 운동이었던 ‘극사실-회화’ 운동을 정리한 미술사적인 전시다. 전시를 통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준모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