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르도에서 와인을 공부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와인의 향기를 표현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건너가기 전에도 동호회의 친구들과 와인을 시음하고 이야기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와인이라도 저마다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는데, 보르도 와인 학교의 동료들은 마치 빨간색과 파란색을 구분하듯 약속한 단어로 향기를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어린 학생들이 사용하는 향기에 대한 어휘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생각해보면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름을 가진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도레미 음계나 빨주노초파남보 같은 색의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해하고 즐기는 소리와 시각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을 것이다.
사진 이민우.
와인 생산지의 이름도 이와 비슷하다. 수준 높은 와인 애호가일수록 많은 와인 생산지의 이름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마고 마을은 보르도 지역에 포함되어 있지만 보르도 와인이라고 불리지 않고 마고 와인이라고 불린다. 대표적으로 샤토 마고, 샤토 지스쿠르 등이 있다. 독립된 생산지 명칭을 가지고 있으면 그 와인을 이해하기도 더 쉬워진다. 와인 애호가들은 마고라고 쓰여 있는 와인들이 보르도 와인보다 훨씬 좋은 와인일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는데, 실제 가격도 3배 이상 비싸다. 부르고뉴 지역의 주브레 샹베르탕이나 본 로마네, 보르도 지역의 포이약, 생 줄리앙의 생산자들은 모두 자신의 동네 이름을 와인에 붙일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세계 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대부분의 와인 생산 국가들은 생산지 명칭에 대한 잘 정비된 규정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농무부, 미국에서는 재무부에서 이 규정을 감독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그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미국이나 프랑스 모두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 사람들이 독립된 이름을 가지고 싶다면 그곳의 환경이 특별하고 결과적으로 현재 좋은 와인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유럽에 비해 규제가 적은 편인 미국에서도 나파 밸리의 스택스립 지역(Stag's Leap District AVA)이 마을 단위의 생산지 명칭을 처음으로 인정받는 데 약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스택스립 지역은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 중 하나로 파리의 심판으로 유명한 스택스립 와인 셀러스를 포함하여 클로 뒤발, 셰이퍼 빈야드와 같은 세계적인 포도원이 위치해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신세계가 인수했다고 하는 셰이퍼 빈야드는 1972년 존 셰이퍼에 의해서 설립된 명문 포도원이다. 그전까지는 수확된 포도를 이웃에 판매하였으나 1978년에 재배한 포도의 품질에 확신을 갖고 이듬해 이웃 양조장 시설을 일부 빌려 와인을 만들어 1981년 처음 시장에 선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셰이퍼 빈야드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드는 힐사이드 셀렉트(Shafer Hillside Select)이다. 셰이퍼 와이너리의 탄생과 함께 시작한 이 와인은 1982년산에는 리저브, 1983년부터 힐사이드 셀렉트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와인스펙테이터가 매년 선정하는 100대 와인에도 두 번 오른 바 있는 명성이 있는 와인이다. 로버트 파커에 의하면 힐사이드 셀렉트의 장점은 빈티지와 상관없이 매년 뛰어난 품질을 보장하는 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셰이퍼 빈야드가 만드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 시라 모두 와인 스펙테이터 100대에 여러 번 선정되었으니, 셰이퍼를 색깔이 다른 4개의 서로 다른 포도를 세계에서 가장 잘 재배하는 와이너리로 꼽아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존 셰이퍼가 가족을 이끌고 멀리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그가 몸담고 있던 출판업계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미디어인 비디오를 도입하자고 하는 그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경영진의 안일한 태도가 도화선이 되었다. 모은 재산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은퇴를 할 수는 없었고, 50살이 되기 전에 자신만의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와인 비즈니스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하고 나파 밸리로 이주하였지만, 당시 존 셰이퍼는 와인이라고는 값싼 포르투갈 와인인 마테우스 로제만 알던 초보였다.
이후 포도밭을 선택하고 포도 묘목을 고르고 포도를 수확할 시점과 판매처를 고르는 모든 의사 결정 과정들이 그에게는 모험이었다. 평생 파이오니어의 길을 걸어온 존 셰이퍼는 지난 2019년 94살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이후 3년이 채 안 되어 셰이퍼 빈야드는 아시아의 회사로 인수되어 새로운 모험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셰이퍼라는 이름에 새겨진 숙명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