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 <매트릭스>는 필자의 인생영화 중 한 편이다. 1999년 세기말 개봉한 <매트릭스> 1편을 시작으로, <매트릭스 리로디드>, <매트릭스 레볼루션>까지 내리 흥행에 성공하며 SF 신드롬을 일으켰다. 18년 만에 그 네 번째 이야기 <매트릭스 리저렉션>으로 ‘부활’했다는 소식에, 코로나19 거리두기로 썰렁한 극장을 찾았다. 그간 스토리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주인공 네오와 트리니티는 어떤 모습일까. 온갖 상상들로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실망스러울 만큼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수십 년 세월을 지나 이제는 중년이 된 주연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초췌한 모습도 안쓰러웠지만,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진화하지 못하고 박제된 서사였다. 인간의 기억마저 AI에 의해 입력·삭제되는 가상의 세계를 다룬 영화의 서사는 개봉 당시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박하지 않을뿐더러, 수시로 끼어드는 전편의 화면들은 현재의 이야기를 심지어 퇴행적으로 보이게까지 했다. 나를 대체한 아바타 혹은 부캐가 실제와 똑같은 디지털 트윈 사무실에서 일하고 가상인물들과 대화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현실이 됐기 때문일 게다. 급속도로 발전한 IT 기술 덕분에 가상세계는 어느새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예정된 미래’가 됐다.
지난달 미국에서 개최된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22’에서도 화두는 메타버스와 메타모빌리티였다.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인터넷 다음 단계는 메타버스, 모바일 다음은 모빌리티”일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뒷받침하듯, 현실과 가상의 메타버스를 연계하는 다양한 AI(인공지능), XR(확장현실), 로봇, 메타휴먼(가상인간) 서비스가 등장했다. “메타버스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며 사명까지 바꾼 메타(옛 페이스북)를 필두로,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무수한 기업들이 올해 메타버스 관련 서비스를 대거 선보일 예정이다. 그야말로 메타버스가 메타버즈(Metabuzz)가 된 형국이다.
메타버스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기업들이 시행착오로 부침을 겪겠지만, 거대한 흐름을 타고 살아남는 기업은 미래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블록체인과 AI를 기반으로 암호화폐, NFT(대체불가능토큰) 등 가상자산도 활성화됨에 따라 현실세계와 같이 생산과 소비, 투자와 거래를 할 수 있는 순환경제시스템인 ‘메타노믹스(Metanomics)’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메타버스, 블록체인, AI, 메타모빌리티와 같은 첨단기술들은 결국 반도체로 구현된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사활을 걸고 반도체 수급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 G2(미국과 중국)는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반도체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굴기’를 앞세운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점유율이 2020년 9%에서 2024년 17%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2024년 한국의 점유율은 20%로 중국과의 격차는 3%포인트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반도체 위기론’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 정부도 ‘반도체특별법’을 만들어 지원을 약속하긴 했지만, 규모나 속도에 있어서 한참 뒤진다는 평가다. 미래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당장 시급한 지원보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득표를 위한 선심성 지원이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미래로 달려가고 있는데, 한국은 대통령선거戰에 발이 묶여 있는 모습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비전과 정책에 대한 논쟁은 없고, 진흙탕 폭로전만 난무한다. 시대착오적이다. 메타노믹스가 다가오고 있는데, 이 시대정신에 걸맞은 대통령은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