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별세한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에 대한 단상 진솔함과 겸허함 재평가받는 대기만성의 거장
입력 : 2021.12.01 17:25:26
수정 : 2021.12.01 17:25:49
지난 11월 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인 빈 필하모닉(빈 필)의 내한공연이 열렸다. 해외 교향악단의 내한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남다른 관심과 화제를 모은 공연이었다. 이날 빈 필은 이탈리아의 거장 리카르도 무티의 지휘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교향곡들을 들려주었다. 세종 대극장의 음향 여건은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무지크페어라인 황금홀의 그것과 판이하기에 기대만큼 화려하고 풍요로운 사운드를 만끽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빈 필이 얼마나 탁월한 연주력과 음악성을 보유한 악단인지 새삼 확인하며 감탄했던 시간이었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공연은 ‘빈 필 신년음악회’의 단골 레퍼토리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제 왈츠>로 유려하고 장쾌하게 마무리되었지만, 그 여운은 길고도 진했다. 필자의 경우 이번 공연을 복기하는 한편 과거 빈과 잘츠부르크, 그리고 국내에서 보았던 빈 필의 공연들을 찬찬히 돌이켜보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과 함께했던 지휘자들의 면면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 빈 필과 함께 자신의 은퇴 공연을 가졌던 한 지휘자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 역시 최고 수준의 거장이었지만 리카르도 무티나 주빈 메타처럼 화려한 스타는 아니었고, 필자로서는 빈 필을 지휘하는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해 아쉬웠던 인물이다. 그는 바로 지난 10월 21일 런던에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네덜란드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였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콘서트와 오페라를 넘나든 거장
1929년 3월 4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하이팅크는 흔히 ‘대기만성형 지휘자’로 거론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는 일찍부터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교향악단과 오페라 극장을 거느리며 두각을 나타낸 정상급 지휘자였기 때문이다.
우선 하이팅크는 (아직 이름에 ‘로열’이라는 칭호가 붙기 전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27년 동안 이끌었던 일로 유명하다. 1956년에 그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대타로 콘세르트허바우를 처음 지휘했을 때, 당시 악단의 상임지휘자였던 에두아르트 판 베이눔은 네덜란드 필하모닉의 상임인 그 젊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그런데 1959년 4월, 58세의 판 베이눔이 리허설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며칠 후 하이팅크는 그 추모음악회에서 지휘봉을 들었다. 그리고 그 해 악단의 제1지휘자를 거쳐 1961년에는 (독일의 거장 오이겐 요훔과 공동으로)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불과 32세 나이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수장 자리를 꿰찼던 것이다. 하이팅크는 콘세르트허바우에서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음악에 대한 단정하고 충실하며 심도 있는 해석으로 명성을 떨쳤고, 무려 1000회 이상의 녹음 활동을 이어가며 악단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교향악단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이팅크는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큰 명성을 떨쳤는데, 그 첫 둥지는 영국 남부의 글라인드본이었다. 그는 1972년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로 데뷔한 이래 매년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 초청받았고, 1978년부터 1988년까지는 이 명망 높은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했다. 또 1987년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런던 로열 오페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아 15년 동안 재임하며 바그너의 <반지> 시리즈를 비롯한 주요 공연들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하이팅크는 런던 필하모닉(1967~1979),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2002~2004), 미국 시카고 심포니(2006~2010)의 상임지휘자, 보스턴 심포니(1995~2004)의 수석객원지휘자를 지냈고, 런던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등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이처럼 평생에 걸쳐 꾸준히 정상의 지위를 고수했던 하이팅크에게 어째서 ‘대기만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것일까?
지난 11월 14일 이탈리아 출신 거장 리카르도 무티의 지휘로 열린 빈 필하모닉 내한 공연
▶진솔하고 겸손했던 인간
하이팅크가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시절은 화려한 스타 지휘자들의 전성시대였다. 그보다 윗세대로는 ‘제왕’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필두로 게오르그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고, 그와 비슷한 연배로는 로린 마젤, 카를로스 클라이버,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리카르도 무티 등이 보다 각광받았다. 아바도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개성 강한 스타일리스트였던 이들에 비해 음악적으로나 외양에서나 별로 튀는 구석 없이 수더분해 보이는 하이팅크는 큰 주목이나 인기를 끌기 어려웠다. 베토벤, 브람스, 슈만,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 등의 교향곡을 전부 녹음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음반을 녹음했지만, 그중에서 각별히 화제가 되거나 특출한 명반으로 꼽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음악에 별다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음반들을 들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텍스트(악보)에 봉사하는 진지함과 견실함, 겸손함이 돋보인다. 윤색도 과장도 없이 솔직한 표현들로 채워진 그 연주들에서는 이렇다 할 개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신중히 귀를 기울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음악의 흐름을 이끌고 재단하는 특유의 열정적이고도 절도 있는 몸짓이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작품의 내면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 인간적인 온기를 감지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개성은 그가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악단이든 그가 지휘하면 매무새가 단정하면서도 두툼한 질감과 묵직한 양감이 느껴지는 독특한 소리를 낸다.
그런 음악의 진가를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카라얀, 번스타인, 솔티 등이 떠나가고 그의 음악에 무르익은 연륜이 더해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그를 아바도, 마젤, 메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으로 인식하고 재평가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그 시간은 하이팅크라는 아티스트의 인간적 성숙 및 예술적 숙성의 시간, 특유의 진솔함이 그윽함으로 승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휘자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하이팅크가 남긴 마지막 기록을 꺼내 보았다. 2019년에 그는 지휘자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며 은퇴를 선언했는데, 이 영상물은 그 해 빈 필과 진행했던 투어 중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에서의 공연 실황을 담은 것이다. 1부는 그의 오랜 동료인 미국 피아니스트 이매뉴얼 액스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 2부는 구스타프 말러와 더불어 그가 천착했던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다. 평생을 음악의 진실을 위해 정진했던 노거장의 마지막 사자후가 심오하고도 담담하게 흐른다. 하이팅크는 이 공연을 하고 얼마 후인 9월 6일 루체른 공연을 끝으로 지휘대에서 영원히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