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사랑했던 감독으로 꼽히는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3가지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이상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은 없다. 나는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에 빠져가는 단계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원래 영화 평론가였다가 직접 영화현장에 투신한 프랑수아 트뤼포처럼 에르베 뷔졸이라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블로거는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 지대의 외진 마을에 자신의 와이너리를 설립하기도 했다. 에르베처럼 와인을 좋아해서 와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유럽의 와인 애호가들에게 와인을 직접 만든다는 것은 열정뿐만 아니라 성공의 상징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명품 와인인 보르도의 5대 샤토는 모두 유명한 기업가들에게 인수되어 지금까지 그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다.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신의 와이너리를 설립한 피터 마이클 경은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사업가이다. 그는 페인트박스라는 그래픽 프로그램을 만든 콴텔을 설립하였다. 성공한 유럽인으로서, 그리고 와인 애호가로서 피터 마이클이 와이너리를 설립할 동기는 분명하다. 영국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을 정도로 꽤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가 와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와인 애호가들은 그의 이름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인인 그가 미국에 와이너리를 설립한 것은 1976년 그의 우연한 경험과 관련이 있다. 피터 마이클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식당에서 프랑스 부르고뉴산 와인을 주문하였으나, 마침 그 식당이 가진 와인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쩌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냉장 운송 기술이 좋지 않았던 시기였고,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당시 미국의 부르고뉴 와인 수입업자들이 와인의 안전한 운송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주문한 와인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는 다른 부르고뉴 와인을 주문하였는데, 그 와인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피터 마이클은 식당의 소믈리에에게 이번에는 프랑스산 와인 대신, 지역의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날 피터 마이클이 추천을 받은 와인은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였고, 이때부터 캘리포니아 와인에 깊이 빠지게 된다. 샤토 몬텔레나는 1976년 파리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최고급 와인과 미국 와인의 비교 시음에서 화이트 와인 부문의 1등을 차지한 와인이다.
자신의 와이너리를 프랑스가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에 설립하기로 한 피터 마이클은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현재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포도밭 혹은 과거에 한 번이라도 포도를 심었던 적이 있는 땅을 구입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곳에 포도를 심는 것이다. 이는 좋은 땅에는 어김없이 빽빽하게 포도를 심은 프랑스에서 와인을 만든다면, 결코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문제이다. 피터 마이클은 파리의 심판 이후 주목을 받기 시작한 나파밸리 대신, 나이츠밸리에 새롭게 포도밭을 조성하고 와이너리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중 하나인 베린저조차 당시 나이츠밸리에서는 중저가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피터 마이클은 이 지역의 잠재력을 굳게 믿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에 최고의 포도밭을 조성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땅을 구입하는 것은 나파밸리의 포도밭을 구매하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했지만, 포도밭을 일구는 데에 헥타르당 7만4000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는 당시 나파밸리의 포도밭을 구매하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2배에서 3배 정도 비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피터 마이클 와이너리는 3개의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포함하여 모두 15개의 와인을 만드는데 그중에서 샤르도네로 만드는 6개의 화이트 와인들은 미국 최고의 와인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나는 얼마 전 ‘피터 마이클 샤르도네 벨 코트’ 2001년산을 시음할 기회가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이 화이트 와인은 여전히 좋은 향기와 질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때 미국 와인은 당장 마시기에는 좋아도 오래 보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나, 설립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피터 마이클의 와인들은 스스로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터 마이클 경
6개의 피터 마이클 샤르도네 와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와인은 ‘나의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닌 ‘몽 플레지르 샤르도네(Peter Michael Mon Plaisir Chardonnay)’이다. 1980년 가장 먼저 조성된 몽 플레지르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로 양조하며 10개월 이상의 오크 숙성 과정을 거쳐서 출시된다. 산도가 없는 진한 버터향을 기대하는 나파 애호가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으나, 레몬을 비롯한 산도 있는 다른 과일향이 어울러져 좋은 균형을 보여준다. 그 이유로 피터 마이클 와인들이 오랜 시간을 견뎌내는 것일 수도 있다.